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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n 01. 2022

고색창연한 캠퍼스를 거닐다, 두 번째 이야기

파이어스톤 도서관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면 유서 깊은 본관과 인문관 바로 옆에 유럽의 성당을 연상케 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그리고 교회와 나란히 또 하나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에 띄는데 이 건물이 바로 프린스턴 대학의 중앙도서관인 파이어스톤 도서관이다. 두 건물이 형제처럼 붙어있지만 안내해 주신 분의 말씀으로는 대학의 그 어떤 건물도 교회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도서관을 건축할 당시 교회보다 낮게 지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서의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소장 공간이 필요했기에 위로 올리지 못하는 대신 땅 밑에 공간을 만들어 부족한 공간을 보충해야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 사진 오른쪽이 교회이고 왼쪽이 교회보다 약간 낮은 파이어스톤 도서관. 겉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지만 지면 아래에는 빙하처럼 큰 공간이 숨겨져 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은 최근 10년에 걸친 리모델링을 마쳤는데 도서관 문을 닫지 않고 공사를 하기 위해 장서를 무려 네 번이나 옮겨가며 진행했다고 한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참아준 학생도, 번거로운 이사 과정을 감내한 직원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델링을 하면서도 건물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 공간에는 옛 건물을 그대로 살려두어 거친 돌벽을 만지며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한편 지하공간에 책을 보존하면 습기로 인한 문제는 없을지 궁금했는데 아직까지 특별히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다는 모양이다. 오히려 위층의 일부가 폭우로 인한 누수로 피해를 입은 적은 있다고 하니 물과 불이 책의 가장 큰 적임을 새삼 실감했다.


§ 리모델링된 도서관의 내부 모습. 한쪽 벽면에는 옛 건물의 돌벽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다른 쪽은 보다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오른쪽 사진의 공간이 누수 피해를 입은 곳으로 원래 이곳에 유명 동문들의 초상화가 잔뜩 걸려 있었는데 빗물에 몽땅 젖어 버렸다는 슬픈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워낙 훼손이 심해 언제 복원될 지도 알 수 없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수해이다. 


도서관은 겉에서 보기에는 몇 백 년 되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시설도 인테리어도 보존을 위해 일부러 남겨둔 공간을 제외하면 매우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파이어스톤 도서관은 각 층별로 주제가 나누어져 있는데 LC라는 미국 의회도서관 분류 체계에 따라 위층부터 철학, 미학, 종교학 등으로 시작해 아래층에는 과학, 의학, 공학 등의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도서관이 워낙 오래된 탓에 한국에서라면 귀중본으로 특별 취급을 받아야 할 것 같은 1800년대 도서들도 일반 서가에서 심심찮게 눈에 띈다. 여기서는 200년이 넘어야 그나마 희귀 도서로 취급해 준다고 하니 장서의 양에서도 질에서도 넘사벽임을 느꼈다.


§ 왼쪽은 도서관에서 보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옛 도서관 공간으로 해리포터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다. 한편 이 도서관은 맨 꼭대기까지 학생들도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는데, 꼭대기층에는 작은 열람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 혼자 조용히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오른쪽은 꼭대기층 창문으로 내다본 프린스턴 대학 캠퍼스 풍경.


프린스턴 대학은 살인적인 공부량을 자랑하는 만큼 많은 열람실 책상들이 책으로 파묻혀 있는데, 저렇게 많은 책을 어떻게 빌렸나 했더니 여기는 대출책수에 제한이 없다고 한다. 설명해 주신 분 말로는 한 번에 1400권까지 빌린 사람도 본 적이 있다던데 도저히 감도 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지적 고난을 선사하는 만큼 학교의 지원도 아낌이 없어서 논문을 집필할 수 있는 개인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읽던 안 읽던 1400권을 들고 오갈 걱정은 없다는 이야기. 한편 이곳은 학부생에게도 상당히 수준 높은 졸업 논문을 요구하기에 과거에는 4학년 학생들을 위한 개인 공간도 있었다고 한다. 이 열람석들은 리모델링을 하며 모두 없앴는데, 아쉬워하는 동문들을 위해 현재는 네 개 정도만 보존용으로 남겨져 있다.


§ 말 그대로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어느 대학원생의 책상을 보니 괜히 마음이 짠해진다. 오른쪽이 보존용으로 남겨진 4학년생 전용 열람석으로 많은 동문들이 찾아와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던 공간을 보며 추억에 잠긴다고 한다. 한편 이 책상들을 다 없앴을 때 재학생들의 반발은 없었을까 궁금했는데 리모델링이 길었던 탓에 이곳을 기억하던 학생들이 모두 졸업을 해버려 아주 평화롭게 철거되었다는 아름다운 답변을 들었다.


한편 프린스턴 대학은 막대한 금액의 기부금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액만으로 따지면 하버드 대학이 더 많지만 프린스턴은 학생 수 2,000명 정도의 소수 정예로 운영되기에 학생 수 대비 기부 금액은 이곳이 훨씬 많다고 한다. 기부금 만으로 향후 100년은 문제없이 운영될 수 있다고 하니 등록금 의존도가 너무 높아 걸핏하면 학교가 휘청이는 한국 사정을 떠올리면 입안이 씁쓸해진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귀중 자료실로 구텐베르크 성경 같은 전 세계 얼마 안 되는 희귀본들이 소장되어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도 이곳 출신이라 그의 친필본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존 그리샴은 최근에 파이어스톤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름 아닌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필본 도난 사건. 이 소식을 들은 관장이 자기 살아생전에 그런 일은 절대 없다며 호언장담을 했다고 하는데, 보물급 자료들이 많은 만큼 보안이 철저해 사방 군데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 그토록 자신만만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책 한 권 훔쳐서 팔자 좀 펴보려 했더니 역시 세상사 만만치 않다.


§ 파이어스톤 도서관 이름의 주인이신 하비 파이어스톤 씨의 기부 명판 및 다양한 기부자 명판들. 기부금 운용을 워낙 잘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도 예산을 한 푼도 삭감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귀중 자료실로 이곳 역시 벽의 한쪽은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되어 신구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천정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햇빛의 강도에 따라 자동으로 색이 진해지기도 하고 투명해지기도 해서 최대한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조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고 한다. 오래도록 지식이 지속될 공간에 어울리는 지속 가능한 설계에 감탄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미국식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왜 낙수효과를 외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많이 있다. 계층 간의 간극을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을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기부금 액수와 기부 문화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 물론 한국에서 낙수효과는 허상에 가깝기에 나는 여전히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린스턴 대학 역시 강력한 동문 파워와 막대한 기부금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의 예쁜 겉모습만이 아닌 깊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투어를 마치고 기차역까지 태워 주시는 배려까지 해주셨는데 기차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필라델피아행 기차에 올라타야 해 무척 죄송스러웠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답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프린스턴을 향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보냈다.


§ 프린스턴에서는 여행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을 들어간 기분으로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무척 뜻깊은 시간이었다. 뉴욕과 달리 자세히 보아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프린스턴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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