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뉴욕을 떠나 한산한 대학 도시 프린스턴을 거쳐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아 시원해 보이는 필라델피아 기차역을 나오자 저 멀리 높은 빌딩들이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뉴욕보다 크기는 작지만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의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빌딩숲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에 속도를 냈다. 해질 무렵인데도 날씨는 전혀 쌀쌀하지 않아 도시를 걷는 기분이 무척 근사하다. 아름다운 시청사와 러브 공원, 성당 등에 조명이 들어오자 도시 곳곳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뉴욕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필라델피아의 밤거리는 이곳만의 수수한 매력이 배어 있다.
§ 러브 공원 너머로 보이는 조명을 밝힌 필라델피아 시청과 빌딩들.
마음 같아서는 도시 곳곳을 쏘다니고 싶었지만 내일의 일정을 고려해 늦지않게 호텔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가까운 러브 공원과 시청을 다시 한번 돌아본 후 1892년부터 운영되었다는 <리딩 터미널 마켓>에서 필리 치즈케이크로 간단히 아침의 허기를 달래고 <자유의 종>로 향했다. 필라델피아는 한때 미국의 수도였던 만큼 가볼 만한 곳이 많이 있는데 특히 독립전쟁 관련 사적지를 많이들 찾는다. <자유의 종> 역시 1776년 독립선언 당시 축하를 위해 울렸던 것으로 유명해졌고, 그 이후 각종 인권운동이 있을 때마다 이 종이 상징적으로 언급되곤 한다. 1846년에 종에 금이 간 후 더 이상 치지 않는다는데, 균열이 간 모습이 묘하게 더 사연이 있어 보인다.
§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자유의 종>. 필라델피아도 보스턴처럼 학교에서 단체로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이 무척 많아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자유의 종 바로 옆에는 독립기념관인 <Independence Hall>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려면 Recreation.gov 에서 입장권을 사전에 예매해야 한다. 미국 여행 중에는 저 사이트를 수시로 확인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 듯하다. 독립기념관 맞은편으로는 <National Constitution Center>가 있는데 이곳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부터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주요 업적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어 미국 정치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건국 초기 대통령 일부와 1900년대 이후 대통령들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중간 부분은 많이 건너뛰어야 했다. 시간에 맞춰 간단한 연극도 진행하고 있었는데, 박물관 직원들은 이 연극이 이곳의 하이라이트라며 관람을 권했으나 도저히 정치 용어들을 알아들을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한편 박물관의 다른 코너에서는 흑인 인권사나 여성인권사 등 모든 시민들이 동등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애써왔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 동상으로 재현한 독립선언의 현장과 패널로 제작해 놓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모습
왼쪽 위의 사진 중 가장 키 큰 사람이 조지 워싱턴이고 가장 왼쪽 키 작은 사람이 초대 재무장관이자 헌법 제정에 큰 공헌을 한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해밀턴의 삶과 헌법 제정 과정은 뮤지컬 <해밀턴>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니 시간을 내어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 말고는 아무도 몰랐는데 마침 전시실에 있던 퇴역 군인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은 군인들을 존경하는 문화 덕분인지 박물관에서 안내하는 퇴역 군인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한편 위 사진의 오른쪽은 여성 참정권 운동의 현장을 패널로 제작해 놓은 모습이다. 세상이 내 뜻대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끔은 서글프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여자는 투표도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디게나마 역사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순간순간의 사건 사고에 좌절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최근 뒤집힌 미국 대법원의 낙태 관련 판결로 인해 내 이웃들이 크게 분노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짧은 영어로 역사는 두발 나아가다 한발 물러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니 너무 절망하지 말고 참고 견디라고 위로했었다. 참고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 것만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테니까. 저 보라색 배너를 든 이름 모를 서프러제트가 어쩐지 우리를 위로하는 듯하다.
§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의 록키 동상과 한산한 모습의 로댕 미술관. 휴관이니 한산한 게 당연하기도 하다.
박물관을 나와 록키 동상을 보기 위하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입구까지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데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훈련하는 장면으로 유명해졌다. 미술관 아래에 록키 동상이 있는데 옆에는 동상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흑인들이 여럿 있다. 나는 무서워서 괜찮다고 적당히 거절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한편 어제 프린스턴 대학을 안내해 주신 분이 <반스 파운데이션>의 미술관이 인상파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니 시간이 나면 들러보라고 알려주셔서 한번 가보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매주 수요일이 정기 휴관일이어서 가지 못했다. 대신 가려던 로댕 미술관도 마찬가지로 수요일이 휴관이어서 밖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그래도 인상파 작품들은 파리의 <오르셰 미술관>에서 많이 보았고 로댕 작품 역시 여러 번 특별전을 통해 접했으니 크게 아쉽지는 않다.
§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저 멀리 고풍스러운 시청사가 보이고 좌우로 현대적인 빌딩 숲이 늘어서 있다. 오른쪽은 필라델피아 도서관 앞에 있던 셰익스피어 기념비로 이 세상은 무대이고 우리는 모두 그저 그 안에서 연기를 펼치는 광대일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도시가 자그맣기도 하고 휴관인 곳이 많아 뜻하지 않게 일정이 여유로워진 우리는 느긋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워싱턴 DC로 떠나기 위해 어제 도착했던 필라델피아 기차역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덜컹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발자국처럼 아쉬움이 남았다. 문득 낮에 셰익스피어 기념비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우리가 모두 광대라면 나는 솜씨 좋은 광대일까, 형편없는 광대일까?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나를 지켜보는 관객이 있다면 열심히 하는 광대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뒤돌아 보기보다 앞을 향해 나아가야겠지. 나는 아쉬움을 떨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빠르게 내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 마음도 워싱턴 DC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 자유의 종 보다 인상 깊었던 러브 공원의 LOVE. 필라델피아에는미국인들의 조국과 자유를 향한 사랑이 넘치는 것 같다. 이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도시에서는누구나 사랑에 빠질 것 같다.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