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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n 13. 2022

기록하고 기억할 것

워싱턴 DC, Part 2

워싱턴 DC에서의 둘째 날이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내가 이쪽 지역을 여행 중이란 걸 알게 된 대학 후배가 연락을 해와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었다. 후배는 대학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지금은 워싱턴 DC의 해군 소속 군무원이라 DC에서 30분 거리의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 머나먼 타국에서 후배를 만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그래도 현지인에게 정보를 얻어야지 싶어 갈 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배는 주로 박물관을 추천했는데 가장 인기인 것은 최근에 생긴 <국립 흑인 역사박물관>이고 <스미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항공우주 박물관은 현재 리모델링으로 휴관 중이라 갈 수가 없어서 흑인 역사박물관과 홀로코스트 기념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흑인 관련 박물관은 애틀랜타에서도 많이 가봤기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가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입장객 수를 제한하고 있어 두 곳 모두 사전에 입장 시간을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다.


§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정면과 희생자들의 사진이 빼곡한 전시실의 모습. 물론 저들은 희생자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기념관은 나치의 집권부터 시작해 전쟁의 진행상황에 따라 유태인, 장애인, 집시와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대학살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몇 년 전에 독일 뮌헨을 가는 길에 근처에 있는 다하우 캠프를 들른 적이 있다. 다하우 캠프는 아우슈비츠 등으로 익히 알려진 대규모 캠프를 만들기 전에 학살의 시스템화가 가능한 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 본 일종의 실험용 소규모 캠프인데, 말이 소규모이지 실제로 보면 굉장히 큰 데다 그 광활한 땅이 너무 고요해 기괴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기념관에도 다하우 캠프를 일부 재현해 놓아서 그때의 무거운 공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픈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며 이런 기념관들을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하우의 공기보다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폭력이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학습되는 것인지, 혹은 둘 다 인지 모르겠으나,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는 기록은 무의미할 뿐이다.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 자신임을 알아야 할 텐데.


§ 무척 화려한 미국 국회도서관 열람실의 천정과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 왼쪽 아래에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가 앉아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나와 미국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미국 국회도서관 역시 견학을 하려면 홈페이지에서 사전에 입장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도서관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그냥 건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이곳은 미네르바 모자이크가 가장 유명한데 바로 앞 계단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일단은 눈으로만 보고 나중에 멀리서 줌으로 당겨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부엉이가 안 보여서 한참 찾았는데 여신 뒤에 검은 부엉이가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는 게 나중에 눈에 띄었다. 아직 날고 있지 않은 것을 보니 동이 트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보다. 나도 언젠가 깨달음을 얻어 나만의 여명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한참 동안 모자이크를 바라보았다. 


§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 내부의 모습과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스미소니언 협회 건물


한편 짬을 내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도 잠깐 들러 구경해 보았다. 자연사박물관은 뉴욕에서도 갔었기에 겹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여기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찍었다기에 왠지 형평성을 고려해 여기도 봐야 할 것만 같아 일단 들어갔다. 워싱턴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라 부담이 없는데다, 자연사박물관은 위의 박물관들과 달리 입장 시간을 예약할 필요도 없어 한결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전시물로만 보면 뉴욕이 훨씬 방대하지만 이곳이 좀 더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연령대가 어린 아이들이라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을 더 재미있어할 것 같다. 나는 공룡뼈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연구원들이 섬세한 붓질로 화석에서 옛 생물들의 흔적을 끄집어내는 모습도 구경하고, 대왕 오징어의 끝도 없이 기나긴 다리를 보고 감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 심해어에 대한 짤막한 영상을 보며 휴식을 취했다. 온통 암흑으로 뒤덮인 심해에 발광체를 지닌 생물들이 만들어 낸 풍경이 묘하게 우주를 닮아 무척 신비로웠다.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언제나 내가 몰랐던 미지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곳이 깊은 바닷속이든 까마득한 우주 저편이든. 나는 박물관에서 여행 속 여행을 즐기며 발바닥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어쩌다 보니 워싱턴 DC에서의 두 번째 날은 기록의 장소들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추악한 역사의 기억들과, 지식과 지혜의 기록들과, 탐험과 발견의 흔적들 사이에서. 기억을 잃은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나온 길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하며 애쓴 노력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장소들은 무척 소중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곳인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를 돌아보았다. 어린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참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준 이들인데 일 년에 하루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도 이런 기념비 덕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감사를 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의 장소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며 나는 깊게 머리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 내셔널 몰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 기념비>.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름에 응한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들을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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