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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북미대륙 최남단 키웨스트

by 더스크

길을 걷노라면 문득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구가 둥글다고는 해도 모든 땅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는 끝이 나타나기 마련일 것이다. 나는 오늘 북미 대륙의 끝을 보기 위해 키웨스트로 떠났다. 키웨스트는 플로리다의 가장 남쪽인 마이애미부터 또다시 차로 4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다. 플로리다와 가장 가까운 키라르고부터 시작해서 키웨스트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섬들을 다리로 연결해 차로 갈 수 있는데,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양 옆으로 투명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어 긴 운전시간도 조금은 덜 지루하게 느껴진다. 이 길이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라고 하던데 과연 절경으로 손에 꼽힐만 한 풍경이었다. 한참을 달려 키웨스트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맬러리 광장(Mallory Square)에 주차를 하고 듀발 거리(Duval Street)을 따라 걸었다. 섬의 주요 관광지가 듀발 거리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석양을 보려면 어차피 맬러리 광장으로 돌아와야 하기에 이곳에서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키웨스트는 작은 섬이지만 볼거리는 적지 않다. 우선 헤밍웨이가 살면서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던 집이 이 섬에 있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헤밍웨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가구와 타자기 및 그의 사진이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집 안과 정원을 누비는 수많은 고양이들이다. 이 고양이들 중 절반은 다지증 고양이라 발톱이 6개 - 정상 고양이의 발톱은 앞발이 5개, 뒷발이 4개이다 - 인데, 헤밍웨이가 생전에 아는 선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다지증 고양이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관람객 따위에 관심도 없다는 듯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보면 이 집의 진짜 주인은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문호였던 헤밍웨이도 결국은 집사 신세를 면하지 못했나 보다.


§ 헤밍웨이의 집은 정원이 제법 큰 데다 꽃과 각종 열대 식물들이 우거져 있어 집 내부를 관람한 후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기 좋다. 물론 정원의 관람로에도 어김없이 고양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에 미천한 인간들은 공손히 옆으로 피해 다녀야 한다.


한편 헤밍웨이의 집 맞은편에는 키웨스트 등대가 있다. 등대 안에 있는 88개의 나선 계단을 따라 오르면 꼭대기의 전망대를 통해 키웨스트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등대는 1825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2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한편 등대 바로 옆에는 작은 박물관도 있어 등대지기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키웨스트 등대는 마을에 있어 무인도 외딴섬에서 파도소리와 달빛을 벗 삼아 한없는 고독을 견뎌내야 했을 등대지기들 보다는 그나마 덜 외로웠을 것 같다.


§ 한 때 플로리다로 향하는 상선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던 등대는 이제는 전망대로서의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88개 계단을 우습게 봤는데 다 올라가니 다리가 상당히 뻐근했다. 어째 외로움 극복하기보다 계단 오르기가 더 난관이었을 같은데.


등대를 나와 10분 정도만 더 걸으면 여기가 북미대륙 최남단임을 알리는 표지석인 Southernmost를 만날 수 있다. 표지석 앞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 대륙의 끝에 왔다는 감흥을 만끽하는 여유 따위는 부릴 수 없고, 잽싸게 기념사진만 찍은 후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표지석에는 쿠바에서 90마일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여기서 마이애미까지 150마일가량 되니 오히려 쿠바가 더 가까울 정도.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쿠바의 하바나를 가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아쉬움은 마이애미의 리틀 하바나에서 달래리라 마음먹고 이 땅의 끝에서 발길을 돌려 대륙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사람이 하도 많아서 Southernmost의 사진을 찍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다음 차례 사람이 오기 전에 겨우 한 장 찍은 표지석. 이 표지석이 키웨스트의 상징인 만큼 기념품 가게마다 Southernmost 관련 기념품이 가득하다. 나는 열대 바다의 느낌이 물씬 나는 귀여운 마그넷을 하나 골랐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맬러리 광장 앞은 석양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오느라 일몰 시간의 10분 전쯤에 광장에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나마 시야가 조금이나마 트인 곳으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얗게 빛나던 태양은 바다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보라색 어두움이 미처 내려오지 못한 수평선은 온통 주홍빛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색이 있을까. 마침내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하루도 애써 빛나 준 태양에 대한 감사인지,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었다는 기쁨의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나도 괜히 들떠 덩달아 박수를 치며 이미 모습을 감춘 태양을 향해 뒤늦은 작별 인사를 고했다.


§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도, 힘겨웠던 기억들도 이제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태양의 굿 나잇 키스는 이토록 달콤하고 포근하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려면 또다시 4시간 가까이를 달려야 한다. 장거리 운전에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할 테지만 이상하게도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의 일정이 끝났는데도 마치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묘하게 들뜬 기분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대륙의 끝에 섰다는 성취감 때문인지, 아름다운 석양에 취한 탓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땅은 끝났지만 내 여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마이애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까만 밤바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붉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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