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Mar 18. 2022

읽고 토론하고 사랑하라, 미국 마을 북클럽에서

첫 번째 책 <Swan House>

시작은 사소한 우연, 혹은 말실수였다. 처음 이웃 사람이 웰컴 선물을 전하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별생각 없이 한번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 이 말은 한국인의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자'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작별 인사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돌아간 후 남편이 미국에서는 초대한다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초대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아뿔싸, 내 입이 방정이었구나'하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며칠 후 이웃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집을 구경하던 이웃이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더니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면 마을에 있는 북클럽에 참석하라고 초대했다. 물론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어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고 이웃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한편으로는 동네에 북클럽이 있는 것이 신기해 호기심도 생겨서 그러마고 대답을 한 후 도서관에서 부랴부랴 다음 모임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다음 모임의 책은 <Swan House>로 한국어 번역본은 없기에 스포일의 부담 없이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한다.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픽션(팩션)으로 1962년에 실제로 있었던 에어프랑스 비행기 사고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사고로 애틀랜타 시민 약 130명이 사망하는데 주인공인 16세 소녀 메리 스완 역시 이 사고로 화가였엄마를 잃는다. 주인공 소녀가 다니는 학교는 해마다 한 명씩 <Raven Dare>를 뽑아 비밀 임무를 맡기는데, 마침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메리 스완이 그 해의 <Raven Dare>로 선발된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얼마 전 애틀랜타의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라진 그림 3점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공교롭게도 3점의 그림 중 하나가 엄마의 작품이다. 그러나 비밀을 풀기 전에 엄마가 사고로 사망했기에 메리 스완은 힘겹게 그림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 숨겨왔던 엄마의 정신병력과 비밀들을 알게 된다. 한편, 엄마의 사고로 비탄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메리 스완에게 흑인 가정부 엘라 매는 애틀랜타의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할 것을 권한다. 부유한 백인이던 메리 스완은 빈민가에서 처음 빈곤의 실체와 흑인 차별에 눈을 뜨고 그들을 도우면서 슬픔에서 빠져나와 성장하게 된다.


§ 북클럽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목요일에 이루어진다. 책은 북클럽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선정하고 책을 선정한 사람이 그 모임의 호스트가 된다. 이번 달의 호스트는 그레이스로 간식과 음료를 준비해 놓고 멤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아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Peach Cobbler>도 만들어 놓았던데 처음 온 나는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한 조각도 못 먹어서 모임 내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영어로 책을 읽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었지만 첫 모임부터 불성실하게 나갈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완독을 한 후 모임에 참석했다. 사실 내 영어 실력으로 토론을 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기에 나는 일종의 참관인 같은 기분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때문에 대학 졸업 후 20여 년 만에 느껴보는 옵저버가 된 느낌이 신선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다들 근황 토크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인들끼리 빠른 속도로 대화할 때는 정말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책 내용으로 토론을 할 때는 모두들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얘기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토론을 따라갈 수 있었다. 멤버들의 대부분은 제법 연세가 있으신 분들 이어서 본인들이 젊었을 때 봤던 인종차별의 경험담 - 모두가 백인이어서 그들이 직접 겪은 것은 아니나 목격했던 일들 - 을 전해 주었다. 단일민족 국가 출신인 나로서는 인종차별에 관한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는데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책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북클럽 시간이 나에게는 일종의 구술사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 이 책의 제목이자 애틀랜타 벅헤드에 실제로 있는 <Swan House>. 모임이 있던 주말에 북클럽 멤버들이 다 함께 이곳을 가기로 했는데, 나는 디즈니랜드 여행을 이미 예약해 놓은 상황이라 같이 가지 못하고 나중에 따로 방문했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제외한 책 속의 장소와 인물들은 모두 실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웃들 중 애틀랜타 토박이인 사람들은 책의 내용에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북클럽을 통해 많은 이웃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히 한 번의 북클럽을 가지고 미국인들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미국 사회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이 마을에 북클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동네에 북클럽이 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는 북클럽을 통해 친목도 다지고 대화를 하며 서로 더 알아가는 기회로 삼는 것 같다. 책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이웃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가. 책은 멤버들이 돌아가며 선정하기에 서로의 취향도 파악할 수 있고, 토론을 통해 서로의 가치관도 알아가게 되고 다른 생각들을 공유하며 생각의 폭을 넓히거나, 같은 생각을 나누며 서로가 지지하고 위로받을 수 있으니 이보다 우아한 친목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더 많이 읽고 토론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이 마을과 이웃들, 그리고 미국에서의 시간들을. 여전히 영어로 책을 읽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고, 기껏 사전에서 찾은 단어들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망각의 강 저편으로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다음 모임에는 입이라도 한 번 뻥긋해보겠다는 가당찮은 야심을 품고 오늘도 책을 펼쳐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읽고 토론하고 사랑하라, 미국 마을 북클럽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