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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May 04. 2022

읽고 토론하고 사랑하라, 미국 마을 북클럽에서

The Great Alone

세 번째 북클럽 날이다. 요새는 날씨가 좋아서 밤공기를 즐기기에 딱이라 책을 선정한 패트리샤의 집 뒤뜰에서 모임을 가졌다. 미국은 집들이 크고 정원이 있는 집이 많아서 그런지 일반 가정집들도 대부분 야외 테이블과 의자들을 갖추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북클럽 사람들이 다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의자들이 푹신한 흔들의자라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패트리샤가 만들어 놓은 시원한 망고 펀치를 한 손에 들고 흔들흔들하며 대화를 즐겼다..기 보다는 들었다.


이번에는 새로 이사 온 이본이 새로운 멤버로 참여해서 그녀를 중심으로 근황 토크를 하다가 토론에 들어갔다. 이번 달의 책은 <The Great Alone>으로 이 책 역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이다. 1970년대가 배경으로 주인공 소녀 레니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아빠가 트라우마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한데다 가장의 역할을 변변히 하지 못하는 탓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사한 아빠의 전우가 알래스카의 집 한 채를 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는 이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족들을 데리고 알래스카로 이주한다. 하지만 아빠가 꿈꾸었던 핑크빛 미래와 달리 알래스카의 환경은 가혹하기만 하다. 기나긴 겨울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그의 폭력성은 점점 강해져만 가고, 무책임하기로는 아빠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주인공 레니는 홀로 생존을 배워 나간다. 위대한 고독의 땅 알래스카에서.


§ 패트리샤의 쿠키와 이달의 책 <The Great Alone>.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요리를 잘하는 것 같다. 나만 빼고. 바람이 초콜릿 쿠키처럼 달콤한 4월의 어느 저녁이다.


책의 내용이 가정 폭력과 베트남전을 다루고 있기에 무겁기는 해도 토론은 활발했다. 마침 새 멤버인 이본의 아버지도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고 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가정 폭력 희생자를 위한 프로그램도 많고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미국도 당시에는 이혼을 쉬쉬하는 분위기라 친정에도 말을 못 하고 남편을 떠나도 달리 갈 데가 없어 폭력을 당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어느 나라나 시대의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 한국이라면 IMF나 세월호 사건이 아닐까 한다 - 미국의 경우 베트남전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어 끊임없이 그에 대한 작품들이 만들어져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하는 듯하다.


이 책은 혹독한 자연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희생자 입장에서 법이나 보호 프로그램의 개선이 얼마나 더디고 무력하게 느껴지는지를 잘 다루고 있다. 가정폭력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이 미비하고, 폭력을 희생자 탓으로 돌리거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더욱 공감이 가는 책이었다. 토론 후에는 요즘이 가드닝 시즌이라 그런지 한창 정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내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는 데보라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나누며 모임을 마쳤다. 출발은 내일인데 돌아오는 날은 기약이 없단다. 얼마 전 은퇴를 했다니 연세가 상당할 텐데 기나긴 순례를 떠나는 것도 대단하고, 어딘가를 기약 없이 떠날 수 있는 여유와 용기도 부럽다. 나는 다치거나 아프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큰맘 먹고 떠났을 텐데 발목이라도 삐끗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면 내가 더 속상할 것 같다.


내가 제대를 앞둔 병장처럼 미국에서 모든 것을 조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기 머무는 시간은 너무 짧기에 침대에서 요양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이제 미국에 온 지 딱 반년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이제 날이 풀려 타운 하우스에 수영장도 다시 오픈을 했으니 다음 책은 풀장 옆 벤치에 누워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느긋하게 읽어 봐야겠다.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북클럽에 참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머무는 동안은 하루하루 충실하게, 두 배로 몸조심하며 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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