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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pr 09. 2022

천사가 다녀간 도시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천사의 도시라고도 하고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만큼 미디어에서 자주 접했던 곳이라 은근히 기대가 다. 이곳은 또 어떤 새로운 매력들을 품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새로운 풍경을 만날 생각에 들뜬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게티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언덕 위에 있어서 모노레일을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미술관 답지 않게 웅장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와서 처음에는 놀이동산에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모노레일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조지아는 이제 코로나를 무시하고 살기로 정한 것 같지만 캘리포니아는 아직 조금 엄격하게 관리하는지 백신 접종 확인서가 있어야만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다. 미술관은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로스앤젤레스 시내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미술 애호가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정원은 예쁜 꽃으로 잘 꾸며져 있고 미술관 외부에 조각 작품들도 많아서 바깥을 거닐며 산책하기만 해도 충분히 돌아볼 가치가 있다.


§ 게티 미술관의 잘 정돈된 정원과 야외 전시물들. 조지아에 오기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년 살았다는 이웃 앤은 이 미술관이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부가 맞지 않았다는 그녀 조차 이 미술관을 좋아했을  만큼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호불호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반할 만한 곳이다.


미술관을 나와 그 유명하다는 베벌리힐즈와 로데오 거리로 향했다. 베벌리힐즈는 고급 주택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로데오 거리에는 명품 샵들 앞에서 길게 줄을 서 입장 차례를 기다리거나 영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거대한 명품 쇼핑백을 양손에 든 사람들로 북적댄다. 전반적으로 럭셔리하고 깔끔한 부자 동네의 느낌이지만 특별한 매력은 느껴지지 않아서 적당히 거리 풍경을 구경하며 걸어 다니다가 커피만 한 잔 마시고 돌아왔다.


§ 오로지 부자들에게만 삶이 되는 베벌리힐즈. 이곳이 삶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유령이 되어 떠돌아다녀야 할 듯. 로데오 거리는 화려하지만 어딘지 식상하다. 줄을 서고 명품을 사는 풍경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으니 허영심의 유니버설 함을 꿰뚫어 본 명품 회사들의 글로벌한 영향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로데오 거리에서 차를 마시며 지친 다리를 한참 쉬다가 할리우드로 향했다. 할리우드 간판이 잘 보인다는 공원을 찾아갔는데 포인트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날이 꽤 쌀쌀했는데도 젊은 사람들은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인생 사진을 건지려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이미 절반은 미국인의 마인드가 된 건지 그저 나이가 들었을 뿐인지 얇은 옷차림의 아가씨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사진 따위야 어떻든 따듯한게 최고라는 생각에 꽁꽁 껴입고 대충 기념사진이나 찍고 내려왔다. 한편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는 별 안에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길게 이어져 있다. 내가 아는 이름을 찾아보려고 좀 걸어 봤지만 하도 많아서 찾기가 쉽지 않다.


§ 유명한 할리우드 간판. 옛 사진을 보면 원래 HOLLYWOOD LAND였는데 어쩐 일인지 LAND는 사라지고 지금은 HOLLYWOOD만 남아있다. 한편 명예의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뤼미에르의 명판. 영화의 도시에서 영화 산업을 발전시킨 인물의 명판을 찾아내 괜히 기분이 좋았다.


할리우드 구경을 마치고 저녁식사까지 끝내자 이미 밤 시간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야경을 보기 위해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했다. 그런데 천문대로 향하는 길이 너무너무 막히는 데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별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가 싶어 놀랬는데 알고 보니 천문대 바로 아래에 있는 공연장에서 큰 콘서트가 열려서 그 관객들이 죄다 몰려들면서 정체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중간에 적당히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로 천문대에 올랐다. 언덕 위에 아담하니 자리한 천문대가 예쁘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로스앤젤레스의 야경 역시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고층빌딩이 많지 않아 화려하지는 않아도 대신 넓게 이어지는 불빛들을 감상할 수 있어 잔잔한 빛의 바다를 보는 기분이다.


§ 영화 <라라 랜드>로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와 잔잔한 불빛이 아름다운 로스앤젤레스의 밤 풍경.


이렇게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하루가 끝났다. 기대가 커서 그런지 솔직히 게티 미술관과 천문대를 제외하면 이 도시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가장 크다는 코리아 타운은 오래돼서 그렇겠지만 너무 낡아 있었고, 무엇보다 교통 지옥이라 가뜩이나 운전하기도 어려운데 커다란 사거리에도 좌회전 신호가 없어서 왼쪽으로 가야 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며 운전대를 틀어야 했다. 천사의 도시라고 하는데 운전자에게는 악마 같은 곳.


한때는 이 도시에 천사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천사는 다녀가고 없어져 그 오랜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다시 천사가 찾아와 그 이름에 걸맞는 우아함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로스앤젤레스의 야경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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