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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y 27. 2021

늙어가는 부모 앞에서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21년 봄의 기록_01


명히 보았다.

딱히 그것이 빛을 반사해 번쩍이는 것도 아니었고, 요즘 가수들이 무대에서 끼고 나오는 화려한 인이어처럼 알록달록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충치를 때울 때, 누가 봐도 때운니처럼 보이는 금이나, 아말감이 아닌, 치아의 색과 가까운 레진과 비슷했다면 비유가 될까.


근 한 달 만에 찾아간 시댁에서 내가 아버님 옆에 앉아 발견해 버린 것은, 아버님 귓속의 보청기였다. 인기 없는 낮 시간대 TV에서나 나오는 광고, 신문에서도 구석대기 쭈구리에서나 보던 게 보청기 광고였는데. 난 그것이 정말 누가 봐도 눈에 띄게 큰 줄만 알았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는 처음으로 대면한 그것의 정체는 귓바퀴도 아니고 귀 속으로 족히 1센티는 들어갔을 법한 곳에 자리할만큼 작은 것이었다. 색도 피부와 흡사했다.

그런데 하찮으리만큼 작은 이것의 정체가, 나의 시간과 감정을 정지시킨 듯 아릿하게 조여왔다.


남편이기 전에 그의 아들이었던 남편 동원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마 동원은 옆에 있었다 해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생각도 잠시, 보청기를 봐버린  0.1초보다도 짧은 그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고, 나는 시선과 표정을 들킬세라 재빨리 눈을 내 아들 신비에게로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죄진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숨길 일 도 아니었다.


고작 한 달 만에 찾아왔지만, 그러잖아도 고 짧은 시간에 쉰 소리가 세진 목소리, 더 조심스러워진 듯한 걸음걸이, 얼굴 곳곳의 짙어진 주름, 손자에게서 뗄 줄을 모르시는 아버님의 눈길에서 시아버지가 아빠보단 할아버지에 가까워졌음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는 좀 나쁜 며느리였다.

가뜩이나 오늘은, 더 화나면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만행을 다 폭로해버리리라 대사까지 만들어서 속으로 읊었던 더 나쁘고 속까지 좁은 며느리였다. 그런데 아버님의 보청기를 발견하자마자 시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남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 건지.

부끄러움이 먼저지만 조금의 억울함도 들면서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읊었던 울분의 대사를 다 잊은듯, 잃었다. 동시에 남편에 대한 그간의 분노도 꽤나 증발해버린 듯했다.


사실 상상실현을 못 할 줄은 알았다. 부부 애정, 가족애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였는데, 육아 경력 약 3년을 채워가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과 내 안의 갈등은 슬프게도 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화와 불만을 마구 뱉는 건 아니어서 기회만 보다가, 시댁에 가려는 참에 시어머니께라도 다 쏟아버리려는 상상이나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부모님은 늘 감사하기에도 빠듯한 분들이었다. 못할 줄 알면서도 상상만 신랄하게 했었는데, 말로 내뱉지도 않은 상상조차도 부끄럽기 짝이 없어져 버렸다.


이 모든 게 아버님의 보청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결국 우리 엄마 아빠들의 노화를 뜻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아버님이 그전에도 귀가 어두워지신 것 같긴 했다. 어머님이랑 같이 있을 땐 좀 나았는데, 혼자 TV를 보실 때는 내 기준에서 좀 지나치다 싶게 볼륨을 크게 해놓으셨던 게 생각났다.

이제는 내 친아빠보다도 시아버지를 많이 보고, 시아버지가 편하다고 생각되던 참인데, 이런 순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나를 보니 시아버지는 시아버진가 싶었다. 아빠였다면 아마도, 마음은 씁쓸했기로서니,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야, 아빠! 보청기 꼈어? 왜 얘기 안 했어? 괜찮아?'

호들갑이라도 떨었을 건데,

나는 그저 시선을 정리하기 바빴고, 그날 시댁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씨부렸는 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머릿속엔 딱 한 번 본 보청기만이 선명했다. 아니, 그 보청기를 끼고 있는 아버님의 옆모습이 그랬다. 내가 본 것이 맞는지 다시 볼 수도 있었는데, 다시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왜 이런 일에도 용기란 게 필요한 걸까. 시선 처리 명분도 있지만, 굳이 확인 사살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그간 아버님의 모습들이 모두 그 보청기가 현실이고 사실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우리가 자라고, 나이가 들고, 늙고, 끝에는 죽는 것.

생명이라면 이치일 만큼 당연한 건데 노화와 죽음은 왜 슬픔으로만 다가오는 건지. 나이 드는 것도 받아들일 줄 알고, 이왕이면 멋지게 늙어가야지. 죽는 순간에도 후회스럽지 않게 행복을 알다 살아가야지. 종종 생각하면서도, 주름과 죽음은 늘 멀리할 수 있다면 하고픈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게 내 얘기일 경우에만 그랬고, 우리 부모들의 그것은 나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부정에 가까운 애잔함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밤이 됐고, 우리는 시댁을 나섰다. 여전히 머릿속은 보청기로 찡한 상태였지만,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남편에게 함구하길 택했다. 평소엔 무심한 듯 보이는 전형적 무뚝뚝 큰아들이지만, 이 아들이, 내 남편이 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생각하고 좋아하는지 다 헤아리지는 못해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말해도 덤덤하겠지만, 운전 중에 혹여 내가 0.1초가 길게 느껴졌던 것처럼, 남편이 알게 되는 그 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까, 조심스러웠다.

아니, 분명 오늘 아침까지도 이를 바득바득 갈며 화나게 했던 남편에게 이게 무슨 감정인 건지.



외부의 갈등이나 큰 사건 앞에서, 우리의 작은 불씨는 눈 녹듯 사라진다. 발냄새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단순 연애 감정을 이은 결혼에서 아이를 만들어 가족을 꾸리더니, 간혹 외면하고픈 상황들이 펼쳐질 때, 더 단단해지는 우리를 본다. 왜 하필 이런 슬플 때, 진짜 가족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래나 저래나 우리들의 엄마들은 할머니가 되었고, 우리들의 아빠들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동안인 나의 엄마가 낯선 아이들로부터 할머니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충격사건을 기억한다. 그때 나도

'할머니? 그건 아니지!'라며 엄마의 충격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것도 기억한다. 이제는 너무나도 할머니라고 하는 손자가 생겨서 할머니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내 눈엔 아직도 엄마는 할머니가 아니라 아줌마에 가까운데, 아니였다.

여기서 잠깐, 멀리서 찾지 말자.

이제 그 아줌마는 내가 되었으니까.


시댁에 갔다던 글 속의 오늘은 저번 주 일요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냥 짠해져서 내일 또 간다고 했다.  간만에, 30포에 오만 오천 원짜리 짜먹는 홍삼이나 사 가야겠다.



p.s. 시아버지보다도 멀어진, 친하지도 않고, 멀게 된 나의 아빠도, 지금은 아저씨보다 할아버지에 가까워진 모습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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