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해연 May 27. 2021

버티는 것에 관한 고백

21년 봄의 기록_02

 꼭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들이 있다. 

가볍게는 지나간 사랑, 어린 날 상처라고 여겼던 크고 작은 사건들, 나의 바보 같은 행동들, 더 나아가서는 사랑했던 존재의 부재. 등 이 그러리라. 대략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10년을 주기로 그것들을 체감한다. 대부분은 내가 피해자고 일종의 상처라고도 할 만한 것들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반면 내 선택이었기에,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고, 내 확신이고 주관이라 믿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과오였을 수 있음을 최근 새롭게 느낀적이 있다. '버티는 삶'이다. 앞서 말했던,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들과 달리, 틀렸다고 생각했고, 싫은 것들이어서 마음이 무겁지도 않고  아쉬움은 있지만 결국 미련이 없어 하찮은 것들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가 가감없이 놓아버렸던 것이 '버티는' 삶이었다

 이십대의 나는 옳다 싶은 건 고민 없이 하는 편이었고, 아니다 싶은 것에도 좀처럼 미련이 없었다. 특히 일에서 그랬다. 하지만 내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듯 직장 환경이 완전한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아는 사실이지만, 스무 살 전까지 혹은 후의 삶에서도 홀로서기 하지 않은 이십대의 나는 성공에도 실패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내가 초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 권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초짜니까, 버티자, 버티자. 해서 해보는데 애초에 ‘잘해보자’가 아닌 ‘버틴다’라는 생각에서는 일의 의욕도, 성취도,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내가 반복되자 근무를 벗어난 바깥에서도 그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도 버티다 버티다 몸에 이상이 오면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이런식으로까지 몸을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일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갈아치운 게 세 차례. 지금은 임신무렵부터 다니던 곳에서 파트타임 강사 일을, 육아 가사와 더불어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행복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것은 멀리하는 듯 살다가, 재작년 즈음부터 스치듯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첫 혹은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이어오는 친구들의 경우 5,6,7년 차 직장인이 되고 있음을 인식할 즘 이었다. '한 곳'에서 n년차 직장인이라. 이 미지수는 3만 넘어가도 대단할 수 있는 숫자였다. 모두의 직장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생으로 쓰러지는 혹사를 경험하면서도 그 직장을 때려치우지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도 갈 데가 없다며 꾸준히 자리를 유지하는 친구가 있었고, 분노하면서도 그만두는 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용기라며 그것이 없다고 자리를 지키는 친구도 있었다. 분명 내 눈엔 그 직장 이상의 곳에서도 능력을 발휘하고도 남을 인재들인데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 끈을 놓지 않는 그들의 심신이 친구로서 우려스러웠다.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던 삼십 대 언저리의 또 어느 날, TV에서 모 축구선수가 부상으로 중요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본인에겐 뼈가 아픈 소식이었겠지만, 나 같은 누군가들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엔 남 일 같이 스치듯 들었다. 

‘선수 부상이야 뭐 흔한 거 아니야?’

 하지만 이들은 신체가 생명이고, 곧 업인 사람들 이었다. 이들이야말로 프로치고 발이며 허리며 멀쩡한 채로 업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최고의 기록을 내야만 이름이 기억되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순간 머릿속이 바다 밑 모래가 일그러지 듯 아득하고도 유쾌하지 않게 흐려졌다. 그동안의 신념과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었음을 인정해야했다. 동시에 나의 자만이었다면 자만이었을 나약함도 직면해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부끄러움과 약간은 후회 직전의 안타까움 같은 거로 스스로를 연민했다. 

 버티는 것을 포기했던 순간에 대해서, 이제 와 여운이 생기는 이유는 두 가지 였다. 

첫째는 지난 그 직장에서 지금까지 일했더라면, 처음 만났던 그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이었다. 초짜이고 가장 어렸을 때라 그만큼 고되기도 했지만, 다시 보면 가장 초짜였던 나를 따라주던 아이들 아닌가. 이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지나간 지 몇 달 후였다.

 수업 준비를 하면서 ‘Red clip’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고 있었다. 한 청년이 빨간 클립 한 개를 가지고 물물교환 거래를 시작해 마지막에는 자기 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단 이야기였다. 읽다 보니 문뜩 이 사건이 일어난 때가 궁금해져서 찾았는데 2008년의 일이었다. 익숙한 숫자였다. 08은 내가 대학을 입학했던 해이자, 학번이기도 했다. 

안일하게도 최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수업에 들어가서 본문을 반쯤 설명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거 꽤 최근 얘기더라? 2008년도에 있었던 일이야 얘들아.’

 ‘2008년도요?’

 그 순간 내 말이 도통 이해 가지 않는 듯한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면 우리 태어난 때 아닌가?’

 그제서야 내 감정의 시간을 제외하고 순전히 숫자라는 것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2008에 10을 더한 2018년을 하고도 3년이 지난 것이 올해 2021년이었다. 지금 막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이었다. 우리들 무리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아기를 낳았을 것이고, 누군가 들은 그렇게 빛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 탄생의 어린 양들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거의 성인 사이즈에 가까운 아이들이라니. 그 당시의 감정은 시간과 나이를 다른 존재로부터 알게 되는 아득하고도 신비스럽고, 책임감마저 더해져 당황스럽고 무겁기도 하는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잔잔하지만 약간의 반감이 섞인 것도 같고, 일종의 당황스럽기도 한 감정이 맴돌았다. 

내가 처음 만났던 오늘의 아이들과 나이가 같았던 그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고도 남은 나이였다. 

버티는 삶을 저버려서 오는 두 번째 여운은 이러하다. 과거의 그곳이 혹여 원만하지는 못한 환경일지라도, 그런대로 내 방식을 찾아 견딜 것은 견디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기운을 내는, 

그런 내 안의 힘이 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이다. 

 시간이 지나서 갈증이 해소가 되는 일들처럼, 시간으로 내 어리석음도 희석이 되면 좋으련만. 이렇게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몰랐던 어리석음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나보다. 그렇지만 알게 돼서 다행이기도하다 내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이었단 것도. 부끄러움도. 다만 앞으로의 내일들에서는, 나의 과오가 흐른 시간 속에서 발견되는 날이 적고 싶다. 

오늘의 부끄러움으로 내일은 더 겸허하고 단단해지기를 소망한다. 

작가의 이전글 늙어가는 부모 앞에서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