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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y 27. 2021

철학과 삶의 간극

21년 봄의 기록_0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




* 이번 글에서는 종교에 관한 견해가 등장하는 데,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짧은 생각이니 혹여 오해가 없길 바라는 바입니다.



1

  " 언니 나는 종교는 있는데, 무신론자야. 진짜 웃기지. 야매 신자야."

  " 그래? 난 반대야. 종교는 없지만 신은 있다고 생각하거든."



  

  때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고 있었던 스물두 살의 나와, 감수성 짙었을 서른의, 그치만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친척 언니가 9월의 낯선 나라 어딘가를 걸으며 나눴던 대화의 일부다. 여행을 떠나 기 전, 종교를 이성적인 판단과 철학적인 접근으로 선택했다 여기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톨릭 교리 중에서 가장 나를 매료시켰던 부분은 아가페라고도 불리는 예수의 무조건 적인 사랑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네 왼쪽 뺨마저 내어주라는 얘기가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여서 그랬는지, 평화보다는 전쟁이 익숙한 부모 아래서 자란 게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이기 전에 인간이었던 예수님이 가진 저 정도의 사랑을 우리도 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고,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자, 진리라고 느꼈기에 반감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가톨릭 교리에 매료되었지만, 신의 유무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스스로 무신론자라 칭했던 이유는, 신이 있다고 여기기엔 세상에 너무 많은 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지전능하다고 하는 신을 믿을 수 없었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더욱이 없었다.


 이런 무신론자인 내가 그냥 평범하게 다른 신앙인처럼 유신론자가 되는 때는 셋 이였다. 하나는, 그냥 단순하게 세상이 아름답고, 감사할 때. 두 번째는, 내가 아플 때. 세 번째는 소중한 사람이 아플 때.


지독히 좋을 때는 감사하고 싶어서 신을 찾고 싶었고, 반대로 지독히 아플 때는 어쩔 수 없이 비굴하게 신을 찾았다.




 언니에게 저 대화를 이어가면서, 마저 오른뺨 얘길 했다. 마치 대단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런데 언니는 그랬다. 혜연아 나는 누가 내 싸대기 때리면 반대쪽 못 대. 언니가 이를 갈며 울분을 토하듯 얘기했다. 언니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신은 그래도 어딘가엔 그냥 있다고 믿는 댔다. 그 때는 아 맞네. 그렇네. 하고서 사실 이게 맞지. 싶었는데 조금은 뭔가 씁쓸했다. 그 씁쓸함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그 대화 앞에 있는 내가 상처가 있다면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언니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쁘고 온전하게만 자란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면, 언니한테 내가 정말 철없이 혼자 행복을 고백하는 것만 같을까 봐 미안할 뻔한 것같은 기분이었다.



2

  최근이라기엔 꽤 오래전부터 엄마와 딸의 관계를 지적하거나 재정립해 주려 하는 심리학적 책들이 많이 나왔었다. 그 중에 한 권을 나도 읽었고, 종종 그 당시 비슷한 메시지의 책들을 훑었었는데,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있다. 감정 쓰레기통 이 그것이다. 화두는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란 얘기였다. 그걸 읽으면서, 사실이지만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짚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공감됐고 위로받았다. 동시에 나는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진 않았는지 점검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엔 종종 친구들도 만나고, 아기 엄마로 인연이 된 언니들도 만나며 좋고 싫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했더랬다. 얘기하지 말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엄마한테도, 남편한테도 종종 열을 내면서 감정을 쏟아낸 적도 있었다. 가끔 너무 고민될 때 친한 친구한테 전화해서 다짜고짜 화났던 일을 얘기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나면 좋았을 때도 있었고, 왠지 찝찝하거나 죄책감 비스무리한 후회스러운 느낌도 들기도 했었다.


  반대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참았고, 시간이 흐른 뒤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길 잘했다, 고 생각이 드는 일도 조금씩 생겼다. 요즘은 전염병 사태로 시시콜콜한 얘기조차 나눌 만남을 자제한 지 오래다. 그게 아니어도 왠지 좋은 사람 누군가를 붙들고 내 얘기를 하는 것을 많이 망설이고 있다. 우연한 기회로 막상 이야길 나누면 정말 좋은데, 그냥 떠올리면 저마다 힘들고 피곤한 게 많을 건데 내가 그 순간 만이라도 짐은 되지 말자는 생각에서다.



  이럴 때면 종종 깊지는 않은 잔잔바리 철학 책들을 펴보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고, 일부 사람들은 인문학이 희망이라고도 했는데 나는 후자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깊게 파고들면 뜬구름파가 이해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주 오래전부터 삶에 대해 나보다 훨씬 많이 고민했던 사람들의 견해는 많은 위로가 되었고, 내 삶의 방향에도 지침이 되었다.


오늘이 누군가 간절했던 내일이라는 것을 알면 정말 쓸데없은 생각이란 것을 알지만 비루하게도 여전히 내 머리는 복잡하고, 사람들과의 재잘거리는 만남이 너무 고픈 요즘이라 간만에 오늘도 철학 책을 펼쳐봤다.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것이 누구에 의해 행해지든, ‘이것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습관을 들여라. (중략) 오직 그것에만 집중하라. 당신이 이런 일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오늘보다 내일 더 선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



 싫은 상황 속 행동에 앞서, 근본을 떠올려주는 것 같아 이 얘기가 마음을 붙잡아줬다. 근데 이제 좀 딴 생각도 든다. 오른뺨을 때린 사람에게 내 왼뺨을 마저 내줄 수는 절대 없다는 언니의 말처럼, 나는 늘 목적을 떠올리며 최선을 선택해서, 내일 더 선해지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바보가 되고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실은 좋고 감사한 게 훨씬 많은데 한낱 억울한 거 하나만 놓고 질질 끌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지극히도 옹졸하단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에 멍 때리며 몇 장 넘기니 이런 말이 나왔다.


현자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과 가장 중요한 사람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는 현재 당신이 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다른 사람과 상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오로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여전히 내 안엔 진리와 삶과, 내 행동 사이에 저마다의 간극이 자리한다. 그치만 다시 일어나 단순하게 현재에서,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즐겁게, 혹은 좋은 것을 해보며, 떠오르는 좋은 마음은 만끽하고, 이따금 따라오는 불안과 분노, 우울 같은 것은 적당히 받아들이고 현명할 만큼만 드러낼 줄 알면서 살아보고 싶다.



인문학이 아무런 부를 창출해내지 못하고, 심지어 눈에보이지도 않으며, 어렵기까지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오는 약간의 위로와 희망이, 죽는순간에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던 예수의 교리를 알고 움직였던 내 마음과 닮았다. 하고많은 철학자들과 존경하는 일부 신앙인들 앞에서 감히 내가 신과 철학을 운운하는게 부끄럽지만, 실은 그것들을 여전히 가치롭게 여기고 있고, 흔들리는 자아가 다시 거기서 희망과 선을 찾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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