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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May 27. 2021

오늘의 사치

21년 봄의 기록_03


비는 내 아들을 뜻하는 글쓰기 애칭이다. 가진 순간부터 이토록 신비한 존재가 인간인지 몰랐고, 낳고 보니 더 신비스러워 신비라 지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뻔한 말을 교과서에서만 보다가, 아기를 낳고 서야 비로소 전적으로 느꼈다. 우리는 모두 신비였다. 아니 신비다. 받는 사랑의 유무, 대소, 종류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신비인 것이다. 내 아들 신비와, 우리 모두의 신비들이 안전하게 사는 삶을 꿈꾸며 생각에 잠겼는데, 도통 정리가 되지 않아 그냥 번호 순으로 나열해보기로했다.



0. 좋은 것에만 집중하며 사는 삶, 조금은 이기적인 걸까. 바꿔 말하면 타인의 아픔에 외면하며 사람 삶은 냉소한 걸까. 설사 내가 다른 이들의 아픔과 세간의 사건 사고에 관심을 갖고 고뇌한 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사실 완전히 행복에만 몰두하는 것도, 완전히 나쁜 것에만 몰두하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완전히 공감하지도, 무언가 할 힘도 없으면서 마치 당장 뭐라도 바뀌지 않으면 분개라도 할 것처럼 몰입되는 것도 이상하게 스스로 위선적이라거나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1. stoically ;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드러내지 않을 때도 있고, 드러낼 때도 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좋은 것에도 나쁜 것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겸허하게 사는 것을 자주 그린다. 조금은 그렇게 살려다가 핀트를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강력 범죄 사건을 볼 때이다. 축복은커녕, 무관심과 구타 속에 마감한 16개월의 생(生), 태어나자마자 창문 밖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단 몇 시간짜리 생, 집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우는 것조차 힘겨워하다 놓아져 버렸을 네 살 짜리 생, 영문도 모른 채 칼부림으로 마감된 엄마와 딸들의 생, 생은 부지했지만, 추악하고 끔찍한 성폭행을 당해버린 어린 생, 어린이집에서 강제 질식으로 마감해 버린 만 1세의 생, 국가 권력에 죽어가고 있는 미얀마와 전쟁국가의 생. 들이 그렇다. 아기 엄마가 된지 오래인 게 이유에서 인지, 더 미어지게 기억되는 게 어린 생들의 사건이다. 그와중에 모든 죽음을 다 알지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아는 것조차 다 담지 못하는 게 부끄럽다.



2.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스무 살의 나에게 가톨릭 성경 속 예수의 말은 종교 말고, 학문적 의미에 가깝게 인상적이었다. 이 생각이 확장되어 가족복지학을 전공했던 나는 교정복지 분야에도 관심을 두기도 했었다. 한 개인이 불행에 가까운 환경 속에 처해 있더라도, 사회와 혹은 또 다른 개인의 선함을 경험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개인은 심신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그 개인이 수감을 해야 할 정도로 중죄인이라 하여도 교화될 수 있다는 게 당시 생각이었다. 이 모든 생각이 정확히는, 아기를 낳고, 180도 바뀌었다. 전적으로 지켜줘야 할 게 생기니, 사상도 바뀐 듯했다. 죄는 죄일 뿐이고,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을 죄악시한다. 죄는 사람에서 나오고, 그 죄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박애주의’를 부정한다.



3. 세간의 흉흉한 소식을 보면서, 분노와 동시에 드는 생각은 ‘조심해야겠다’였다. 왜 인적이 드문 곳은 조심하면서 다녀야 하는지, 어린이집의 선생님들에겐 감사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왜 의심을 하고 또 거두길 반복해야 하는 건지, 5분 전에 나와 통화했던 엄마에게 변기통에 핸드폰을 빠뜨렸다며 민증사진을 요구하는 피싱 사기범을 우리가 왜 조심하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4. 길가에 핀 선홍색류 철쭉과 진달래가 아름답고, 고개를 들면 어느덧 가지를 빼곡히 메운 계수나무의 하트 모양 잎이 아름답다. 연륜과 추억이 묻어나는 세 명의 남자 가수들이 불러주는 노래가 아름답고,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남남이었던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한 순간들이 아름답고, 그 부부 사이에서 나온 아기의 존재와 성장이 아름답다.


앞서, 죽음의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었듯이 아름다운 것들도 다 나열할 수 없다. 우리 세상엔 고되다면 고된 것도 많지만, 아름답고 좋은 것도 많은 게 세상 아닐까. 내가 이따금 미에 심취하는 것이, 지금 아무 합당한 이유 없이 고통받거나 죽어가고 있는 생들에게 사치가 되는 일이 더 이상은 없었으면 한다.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위해 하는 있는 일이, 그 영의 안녕을 위해 하는 기도뿐이라는 게 한스럽다.




복잡한 마음이 반영된 듯, 평소 자면서 꿈과는 거리가 먼 내가 이번 주 내내 꿈자리가 사납다. 이러다 다시 살기 바빠지는 위선과 고뇌를 반복할 것이다. 나의 행복과 만족을 유지하려는 이 마음과 노력이 사치로 느껴지는 오늘이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애석하게도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퍼렐 윌리엄스의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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