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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n 16. 2021

자식의 첫 입원기

2021년 봄과 여름 사이의 기록. 01

  불과 저번 주의 일이다. 그런데 한 달 즘의 시간이 흐른 먼 과거의 일인 것 같다.

(심지어 글을 올리는 지금, 저 때는 약 한달 전 이다.) 하루 한 시가 무섭게 그 때의 감정과 기억이 잊혀지는 걸 보니, 내색은 많이 못 했지만 정신적으로 꽤나 고단하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살면서 내가 가장 유약해지는 때는, 내가 아프거나 혹은 소중한 사람이 아플 때 그것을 지켜봐야 할 때이다. 자식의 입원은 단연 후자의 일이었다. 신비가 두 돌이 지난 지도 꽤 되고, 이제는 세 돌에 가까워지는 무렵인데, 여태껏 고열 등의 병치레로 입원이나 응급실의 신세를 져 보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아무튼 하루, 이틀 간헐적이긴 했지만 그렇게 일주일 이상을 신비가 열이 완전히 잡히지 않고, 약도 잘 먹지 않아 개선이 어려워 보이니 입원해서 수액으로 증상을 잡아보기로 결정하였다. 수액 처방이나 입원 결정을 조금은 예상은 하던 바여서 일부러 병실이 갖춰져 있는 큰 어린이 병원을 찾아갔지만, 막상 ‘입원’이라는 단어를 주치의 선생님을 통해 들으니 그 순간에 엄마나 뭐 이런 위치 말고 순수하게 '내'가 무섭고, 두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섭고 두려운 것도 잠시, 병원을 싫어하는 신비가 진즉부터 병원이 떠나가라 울고 있어서, 나까지 우는 진상엄마가 될 순 없으므로 ‘나’말고 '엄마'의 신분으로 정신줄을 아득하게 붙잡았다. 왜 한참이나 지나 글을 쓰는 지금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맨날 난 이런 식이다. 눈물도 뒷북이다. 


 진료실을 나오기 무섭게 각종 검사가 나와 신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원을 앞둔 시점에다가 코로나 시국까지 겹쳤으므로, 그전에 했던 간이검사와는 비교가 안되는 높은 문턱이었다. 신비는 난생처음 엑스레이를 찍고,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아 꽤나 많아 보이는 양의 피를 뽑아 검사실로 넘겼으며, 그게 끝나자 흐르는 피를 손바닥 크기의 해열제와 긴 이름의 포도당이라고 쓰여있는 일반적 사이즈 수액으로 막았다. 큰 반항이 예상되므로, 손바닥에는 토끼 자수의 암보드를 대고 손 전체를 의료용 테이프로 단단하게 감았다.

 온 얼굴과 몸으로 울고 있는 신비가 일차로 안쓰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온전히 약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과 가까이에 언제든 신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치해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있음에 안도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삿바늘의 아픔과 거부스러움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코로나 검사였다. 나는 전에 강사 전수검사 경험으로 한차례 겪어 본 것이어서 생각만큼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조금 무서웠는데 그것을 엄마의 신분에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속하게도 긴 검사용 키트가 내 비강을 뚫고 나올 때 같이 흐르는 눈물이 좀 우스운 와중에도, 그다음 받게 될 신비의 검사가 걱정됐다. 휴, 주삿바늘을 찌를 때와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으로 신비는 온몸으로 검사를 거부했다. 찢어지는 당황스러움이 올라왔지만 온몸으로 아이를 안기 바빴다.

드디어 공포의 각종 검사가 끝나자 신비는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만 2살의 나이에도 어색한지, 손에 힘을 주어 허공에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꾸 집에 가자. 고 했다. 이제 제법 말로 의사를 표현할 줄 알아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그 의사를 더 정확히 알아서 안쓰럽기도 했다. 


 입원의 경험은 내가 아이였을 때, 아기를 낳을 때 해보았던 거지만 보호자로서는 처음으로 해보는 수속 절차에 따른 서류에 서명과 체크 등을 했다. 실은 꺽꺽 눈물이 날 것 같은 바보 같은 엄마의 심정이었지만, 입원하는 아기들과 엄마의 모습이 익숙도 할 차분하고도 친절한 검사실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입원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어린이 병원의 입원실은 처음인데 일반 병원 특유의 바쁘고 긴박하며 또 적적한 그 모습이 아니어서 또 생각보다 많이 슬프지 않았다. 


 남편, 엄마, 시어머니께 바쁜 와중에도 소식을 알렸다. 시어머니랑 시아버지가 득돌같이 달려오셨다. 코로나 상황이어서 잠깐 보고 가셨지만, 신비의 병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젖은 얼굴이셨던 어머님은 38선 이후로 만난 남과 북의 형제 만난 듯 울고 가셨다. 


 어떻게든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는 병실생활은 다행히 2박 3일로 종료될 수 있었다. 1일차 밤에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집에 가자를 외치다 지쳐 잠에든 신비도 2일차에는 신기하게도 적응이 됐는지 나름 병실과 병실 밖 복도에서 노는 것 들을 찾아 지내고 있었다.


 입원하기 전에 나는 신비와 함께 자기가 익숙해지면서, 커다란 짐짝이 돼버린 푸근한 어른 침대를 너무 그리워했다. 자도 자는 것이 아니라며 하루라도 대짜로 숙면을 취해보고 좀 싶다고 습관처럼 얘기하던 나였다. 

흔히들 고단이 함께하는 여행을 떠나보면 도리어 집이 최고였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불편하게 찌그러져자던 우리 집 안방구석이 이토록 편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이런 식으로 일상의 불편마저 편리와 행복으로 깨달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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