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지 않은 어른의 설날
유부녀의 8년차 설맞이
엊그제는 새해 설날이었다. 설은 '새로운 해'의 첫 명절인 게 당연하지만 새삼스레 새해를 붙여본다. 새해도, 설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시간이 빨리 가서 새삼스러울 게 전혀 없기에 좀 새삼스럽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글을 쓰려고 끄적거려 놓은 메모에는 추석을 엑스표 치고 설로 고쳐놓았다.
그런 추석 같은 설에, 시어머니만큼이나 부지런하고 만능으로다가 대단해 보이는 일들을 착착착 한 것도 아니면서, 나는 세상 바빠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있었다. 설 전날과 당일 시댁에서 말이다. 명절이라면 어느덧 '어른'의 입장에 있는 나의 모습이, 보기에는 익숙해져 있을 때쯤 유독 올 설에 스치듯 보이는 게 있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명절에 모이는 조부모대나 부모대 어른들의 모습은 되게나 어른 같았다. 그렇게 할머니댁에 하나둘 씩 모이는 때면, 가식적인 듯 자연스러운 듯 반복되는 인사. 잠깐의 인사를 끝으로 다시 주방으로 모이는 여자 어른들. 널찍한 나무상을 깔고 닦으며, 오래된 한지와 먹이 먼지와 어우러져 특유의 향에 가까운 냄새를 풍기는 병풍을 나르는 남자 어른들. 그 모든 어른의 일들이 그래 보였다.
그들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쨌든 엄청나게 나이 들었다고 생각했고, 일하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어른의 모습이었다(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실제로 어떤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 오간 것을 제외하면). 이혼한 부모를 가진 내 본가 사정이 그렇듯, 그곳이 한 번도 편해본 기억은 없지만, 분명한 건 그 당시 어른들은 그런 어른의 일들이 익숙하고 잘하는 그냥 원래 그런 어른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 제사에 어린 나는 일에 있어서는 있으나마 나한 존재였는데 이제는 내가 명절일에 가지 않으면 엄청나게 죄스러울 것 같은 위치가 되어있다. 그때 할머니들이나 엄마들처럼, 뭐든 뚝딱뚝딱 만들어내고, 일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어른 같은 사람이 아닌데.
일종에 최소한의 예의만으로 일을 '거들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하는 데도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한 번도 뭔가를 주도한 적도 하려던 적도 없다. 모조리 우리 시어머니의 몫이다. 제사음식을 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지도, 당일에도 일찍은커녕 '가장 늦게 일어나는' 어른이다 나는.
최대한인 듯 최소한이지만 어쩐지 계속 객체이며 어색하기만 한 일들은 계속 있었다. 명절이 벌써 10년 차인데 차례상에 올리는 북어를 머리와 꼬리를 다 자르는지 아닌 건지를 아직도 모른다며 내게 물어보는 동서와, 그렇다면 나는 8년 차인데 나도 모른다며 웃어버리는 대화에서. 당일의 행사들을 다 치르고 쉴 만큼 다 쉬다가 가려고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순간에, 다과 바구니에 들어있는 약과 꾸러미를 보며
"어머님 저 약과.. 가져가도 돼요?" ("다 가져가 다 먹어 먹어.")
"아, 이 젤리도 가져갈게요. "라며 흐흣 거리는 나를 보며.
이 밖에 모든 순간들이 그렇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의 모습과 태도와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하물며 그때 나의할머니네서는 맘 편히 집어먹지 못했던 제사상의 간식들을 이제 여기서나 적당히 집어먹을 줄 아는 몸만 큰 어린이 같은데 그게 조금 좋기도 했다.
이 설날을 자꾸 추석이라 할 만큼 작년이 유독 시간이 빠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명절을 맞이한 지 각각 10, 8년 차가 됐다는 동서와 나를 보자 더욱 우리들이 어른답지 못하다기보다 어리다고 느껴졌다. 꼭 시어머니가 와야지 북어의 꼬리를 마저 잘라야 하는지 아닌지 답이 나는 상황을 보며 더욱 그 사실이 명백해졌다.
내가 아이였을 당시 시어머니와 우리 엄마는 젊은 어른이었고, 이제는 그들이 '할머니'에 속하는 큰 어른의 자리에, 아이였던 우리는 어린 어른의 자리에 서있다. 내 부모는 이혼을 했으니 엄마가 제사상을 차리는 일도, 내가 친가에 가서 제사를 도우는 일도 보지 않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지 모르겠지만, 매 명절마다 시댁에서만 차례상을 준비하는 일들을 매년 최소 2차례 이상은 꼬박 씩 지내는 데 어쩐지 우리가 그 당시의 어린 어른의 느낌은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의식은 전혀 없음이 이유 같았다. 내가 시댁에서 상을 차리는 일에 비효율과 관련한 요즘식 불만이 거의 없음과 별개로 말이다.
가만 보니 내 집에서처럼 요리와 집안인을 최소한의 의무로만 '겨우'하던 마음의 모양새가 여기로도 이어지는 모양도 같았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계시니 도우는 게 인지상정이란 생각 하나만으로 내 딴엔 뭔가 하긴 하지만, 끝내는 어색한 이 마음과 어리숙한 태도가 마음에 밟혔다. 그렇다면 내가 낳은 절대적으로 어린 내 아이에게 나는 이래나 저래나 내가 확실한 어른의 모양 일건대 알고 보면 어색해 죽겠는 나의 이런 모습들을 보며 이 아이는 엄마이자 어른인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보면, 이유야 어쨌든 매 명절마다 병이 났던 우리 엄마의 모습은 내 기억에까지만 놓고 지운채, 조금 보수적이라 할지라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우리 시어머님의 모습을 많이 보고 고대로는 아니더라도 반의 반 정도는 따르고 싶었다. 내 기준에서 완전하게 편한 할머니 할아버지네가 있을 수 있는 이 아이가 명절이 즐겁고 정겨운 날들로 기억되길 바라며.
추석인지 설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설이라는 대단한 명절은 의무감만 겨우 채운채 지났다. 결혼 전엔 그마저도 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했지만, 벼락치기하듯 해치워 버렸던 급한 마음이 꺼지고 설이 지나니 그 당시에 안 보였던 것들이 보였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바빴는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색해도 매 순간은 진심으로 내 일에 충실하고 서로의 복을 빌었으니, 하늘에 계신 박 씨 조상님들이 살아있는 박 씨 일가인 우리를 이쁘게 봐주시길.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바라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