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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Feb 27. 2024

졸업과 시작

모든 게 다 커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친척어른들, 최소 6살은 더 많았던 친척 언니오빠들, 선생님, 그렇게 알거나 모르는 모든 어른들. 학교, 학원, 63 빌딩 그런 건물들, 그곳으로 가는 길. 거기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어른들의 말과 행동들. 사람인 , 사람이 아닌 것.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지만 들을 수 있는 것. 어린 손안에 쥘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내 몸과 그들의 크기에 비례해 크다고 느꼈다기보다, 그것들이 무엇이든 커 보이기 전에 그냥 큰 것들이었다. 그리고 크다는 표현을 쓰기가 좀 그런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 맛있었다. 밤에 아빠가 술안주로 먹는 말린 오징어도, 학교 앞에 너저분하고 복잡한 문방구 안에서만 팔던 밍밍한 100원짜리 아이스크림도, 일반가게의 200원인가 300원짜리 메로나도. 학교 앞 달달한 300원짜리 컵떡볶이도.

그나저나 나는 가끔 꿈을 꾸면 나이가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다. 시달림이 없는 정상적인 배경이라면 대부분 고등학생이다. 얼마 전까진 사람까지 그 시절 사람들이었는데, 최근엔 배경과 직분만 학생일 뿐 주변인은 지금 사람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꿈얘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커 보이고 맛있어만 보이던 시절이 엊그제인 듯 그때에 머물러 있는 듯한데, 사실은 (당연히) 내가 애가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시간은 빨리 흘렀고, 나는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고, 부모까지 되었는데, 마음은 어렸을 때랑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여전히 커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 하물며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끔 여의도 같은 서울 번화가에 나오면 고개를 한참 뒤로 뻗어야만 볼 수 있는, 건물의 둘레가 가늠이 되지 않는 건물들에 압도당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그때 경기도 보다 더 먼 지방에 사는데 가끔이나 보는 그런 큰 건물들이나,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입 벌리고 멈추어 있지 않는다. 안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렇다.

오히려 작은 들꽃이나, 아이나 사람들의 사사로운 행동과 말에 마음이 기우는 일들이 있기도 하지만,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시선을 영영 잃은 듯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 슬쩍 씁쓸하다.

내가 꿈에 머물러 있는 19세가 사실이라고 치면, 이게 얼마나 민망한 건지는 나이비교로 알게 된다. 19세 누나들이랑 한국나이로 7세가 된 내 아들과의 나이차가 12살, 36세 나와 19세의 차이는 17년이니까. 그리고 대부분이 커 보이고, 맛있던 그 시선은 나의 아이가 대신 가지고 갔겠다.


나도 영원히 아이거나 학생일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성인이 되었다. 내가 낳은 아이도 영원히 아기일 줄 알았는데, 어린이가 되었다. 오늘은 아이가 2번째로 간 큰 규모의 어린이집을 6세로 수료하는 날이다. 수료나 졸업, 마무리 같은 단어는 늘 나에게 따뜻한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세상이 크고 작은지 어떤지 모르게 내가 무뎌진 만큼, 당장 내 앞에 있는 아이만 보며 좁은 세상을 살고 있었는데, 시선의 변화와는 별개로 이제는 아이들의 성장으로 우리의 시간을 실감한다. 결혼 전에는 나와 관련한 마무리만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가 마주하는 마무리들이 기다리고 있고, 짧은 다음에는 새로운 출발이 기다린다. 마무리도 출발도 멈출 새 없이 마주해 간다. 아이가 볼 큰 사람들인 나와 우리가, 이들이 가는 길을 이왕이면 아름답고도 편안케, 맛있게, 만들고 보여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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