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코, 싸움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인 적 없다. 내게 싸움이란, 대개 부모나 다른 어른들의 몫이었고, 괴로운 불안이었다. 아니, 불안인지 몰랐으며 피할 수 있다면 어떤 비겁한 변명을 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어린이를 벗어난 지금 내게 싸움이란 불안보다는 분노와 혐오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어린 내게 가족과의 기억은, 있어도 없어도 불투명하다. 반면, 어딜 가나 부모 혹은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라면 편하고도 불편하던 기분만큼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명하다. 엄마는 쌈닭이 아니었지만, 어린 내가 느끼기엔 쌈닭 같아서 조마조마했고, 그렇다고 아빠가 쌈닭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쌈닭 같은 부모와 쌈닭 전용 우리 안에서 살았던 나는 사랑에 대한 로망이 없을 법도 한데, 꾸준히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마음이 아낌이 없었고, 즐거워했다. 그렇게 일방적인 짝사랑만 하다 말 것 같던 나는 의외로 쌍방의 사랑에 도달했고 열렬히 즐거워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있을 것 같지 않던 결혼을 하기로 했다.
결혼은 설마인지 역시나인지 아님 둘 다인듯 순탄치 않았다. 내 인생에 얼마 없던 '순수하고도 진한 기쁨'일 수 있던 과정이었다. 그것을 내 부모가 망칠 뻔했다. 결혼 후에도, 때가 되면 수시로 한 사람씩에게 번갈아가면서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장모님이랑 장인어른은 둘 다 다르게 쎄."
그 뒤에 나와 동생이 기를 못 펴고 산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기를 못 펴고 산다는 속뜻은 말해주지 않아도 진즉 알고 있었다. 내가 성인이지만, 부모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못했다는 것. 내가 먼저 그것을 알게 된 후로 진정한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둘 다 세다는 것은 제삼자인 남편이 말해주어서 비로소 알게 된, 딸인 나도 모르던 부모에 대한 팩트였다. 그동안 나는 부모 실체를 부정하면서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
도통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그 둘은 끝내 갈라졌다. 딸이 결혼할 때 즘엔 남자만 새 부인을 얻어 살았다. 여자는 스스로 딸의 거처 근처로 자신의 집을 옮겨 딸과 왕래했다. 남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듯, 딸에게 있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갔고 딸과는 가끔 전화로만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남자는 딸의 이사했다는 집에 혼자 와서 하루를 묵고 가기로 했다. 늘 그렇듯 대뜸 오는 전화였다. 남자는 경기권에서 충청권으로 일하는 현장을 옮겨가는데, 중간에 시간이 빈다는 핑계로 냅다 딸네집에 들른다고 그랬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다. 딸은 도통 어떤 기분인지를 몰라했다. 부모나, 원가족의 어떤 일들에 있어서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잃은 건지, 아니면 안 적이 없었던 건지 몰랐다.
남자가 앉은 딸네 집 6인용 식탁은 딸과 사위, 손자, 남자가 모두 앉기 좋은 사이즈였다. 딸의 집에서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처음 있는 구도였다. 모처럼 쌈이 없는 분위기에 좋고 행복해야 할 것 같지만, 딸은 지금의 구도, 이야기, 사람, 분위기가 모두 어색했다. 여전히 딸은 좋은 것인지 싫은 것인지 그냥 나쁘지 않은 것인지 도통 몰랐다.
갑자기 남자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색하게 평화롭고 적당히 시끄러운 4인의 식탁 위에서였다. 또래보다 조금 젊어 보이긴 하지만, 명색이 70이 된 남자의 벨소리는 예외 없이 데시벨이 높았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누구라도, 어떤 대화라도 중단하고 그 휴대폰으로 시선이 모이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의 서사에 큰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 사위와, 아직 한글 모양이 내포하는 의미를 보이는 그대로 눈과 동시에 뇌로 즉각 흡수하지 못할 만 5세 어린아이는 그 이름을 보았을까.
'고귀한 사람'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딸의 눈과 그의 휴대폰 화면이 마주쳤다. 화면에 쓰여있는 말이었다. 발신자였다.
*
나는 아빠의 사람들 중에서, 아빠의 언어에서 고귀한 사람이 누구인지, 있기는 했는지, 서른 하고도 다섯 해나 더 먹었을 동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목소리를 듣지 않고도 한 번에 고귀한 사람이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고귀한 사람은, 아빠에게 딸네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귀한 사람은 확실히 고귀한 분이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 뿐, 나와 동생에게 좋은 아빠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남자가 됐을 때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냥 처음부터 나의 아빠였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잠깐만 나의 원가족에서 나를 멀리 떼고 보는 시선이 가능해질 때, 아빠가 만나는 그분이 좋은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고귀한 사람은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아빠가 엄마에게 좋은 남편이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아빠에게 좋은 아내이지 않았지만, 다시 만나는 사람과 끝사랑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왕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제3자의 위치에 서게하는 게 가능한 찰나에만 가능한 생각이었다. 나는 아빠 휴대폰 안의 고귀한 사람 5글자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6인용 식탁에 앉은 구조에서 나오는 어색한 평화로움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것과 비슷한 불편함이 솟구치는 열댓살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이름만큼이나 아껴줘야 할 것 같은 다섯 글자의 찰나는 성인이 된 내가 느끼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의 파도를 몰고 왔다. 나는 파도가 닿는 예쁜 해변 끝에서 홀로 휘청였지만,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으려고, 식탁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혹은 상추나 맥주, 컵 같은 것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이 감정을 느껴서도 안되고, 들켜서도 안될 것처럼.
엄마는 아빠에게 한 번이라도 고귀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는가. 먼저 엄마도 그에게 고귀한 사람이 되어주었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지만, 이내 배신감이 드는 건 생물학적인 딸로서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빠는 고귀한 사람에게 갔고, 나는 비로소 진정하고도 온전한 평화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