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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n 18. 2022

나의 간사한 제주 여행기 2(시작과 끝)

드디어 디데이.

나는 평소보다 많은 짐과 아이와 처음 타는 비행기라는 일정에 긴장이 된 탓인지 준비를 다 했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현관을 나섰는데 신발을 신으면서 바닥에 놓고 온 아이 마스크가 떠올랐다.

"마스크!" 하고 다시 현관 비번을 누르는데 남편의 망언이 나왔다.




"오.늘.은. 갈.수.있.겠.니.?"




부디 이것이 시작은 아니길.


아주 계획적이시고 부지런하신 분이 보기엔 허둥거리는 내가 못마땅했을 거고 나름 순화시켜서 한 말이겠지만, 나는 그 비꼬는 말투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이미 충분히 일찍 출발하는 일정에 맞춘 상태였는데 '괜찮아, 안 늦었어 천천히 해.'라고 말하는 남편을 기대하는 게 대단한 욕심인 건가. 그리고, 마스크 같은 건 자기가 한번 더 돌아봐줬어도 될일 아니었나. 안정감을 주지도 못할 망정 비꼬는 말을 하는 게 내 남편이라는 사실에 남편이 원망스럽지도 않고 그냥 그것을 선택한 내가 부끄러웠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선명한 여행의 시작점이었고, 아이가 있어서 여전히 참았다. (잘하고 있는 걸까.)




청주공항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 수준이라더니,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고, 덕분에 확실히 비행기 타는 기분, 멀리 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공항에는 우리와 같이 제주든 가까운 해외든 누가 봐도 멀리 가는 사람들로 보이는 짐과 발걸음과 기다림으로 붐볐다. 그리고 여기 남편과 같이 한껏 예민해져 있어 시작부터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많이 보였다. 그들의 평화를 빌어주기엔 내 코가 석자니 무시하고, 그냥 여행에 충실한 공항, 우리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는 신이 한껏 난 게 펄쩍 거리는 발걸음, 조잘거리는 말에서 가득 느껴졌다. 그거 하나로 나는 모든 게 다시 좋아지고 감사해졌다. 이런 사람이다 나는.


짐 수속을 마치고, 처음으로 몸수색 대도 통과하고 직원의 요청에 따라 만세도 혼자 씩씩하게 해내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기특하다 못해 행복감이 느껴졌다.


하늘에서만 본 손가락만 한 비행기가 자동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거라는 거, 그것을 아이가 봤고 드디어 탔고, 30분 남짓한 거리를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 여기서 나는 여행 목표의 절반을 이뤘다.

청주에서 제주로





 예상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람과 비와 습기는 덤이었던 오늘의 제주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도착한 제주의 바다는 바람에 치는 파도가 무서울지언정 아름다웠다. 습기와 작은 빗방울들에 우산이고 우비고 소용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다 새롭고 재밌고 좋았다. 첫날 본 바다는 까만 현무암 바위와 방파제 위로 파도치는 바위라 멀리서만 보고 지나갔다. 바다는 바단데 모래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게 아이의 최종 바다의 목적이었으므로 바다 자체만으로는 반만 목표를 수확한 셈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바다. 비,바람의 언덕 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비록 나 혼자나, 친구랑 할 때만큼이나 온전히 여행지의 풍광에 빠지지는 못해도 그 아쉬움이, 아이가 느끼는 경험과 만족감으로 채워졌다.

결코 아쉽지만은 않은 아쉬움이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동반하지 않은 처음이자 오랜만의 제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짜릿한 볼거리와 내음과 소리를 내어주었다. 다들 발길을 멈추는 바다나, 아쿠아리움 같은 특별한 곳에 내리지 않아도 이국적이 게까지 느껴지는 들판이나 숲 같이 마음을 다하여 좋아해 줄 수 있는 풍경이 계속되는 게 좋았다.

차안에서 보이는 풍경도 좋았다.


 그런데 이들이 더 아름다운 만큼,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더욱 이 순간들이 진정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느긋하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대단히 계획스러운 여행을 하는 남편을 최대한 많이 맞춰줬다고 생각했는데, 계획한 것보다도 더 미리미리 하지 못한 나를 보며 여전히 한껏 예민만 해져 있는 남편을 보면서 누굴 탓할 것도 없이 그냥, 결혼 잘못했다, 잘못했다 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비는 내 눈물인걸까,.




 꼭 혼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도, 친구도 잠시 내려두고 혼자 와야지. 누구의 기분도 취향도 배려할 것도 없이, 오로지 내 마음 내 눈길 내 발길에만 집중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벼운 소형차 렌트해서 눈길 가는 곳마다 내려야지. 마음껏 눈에도 가슴에도 코에도 담아둬야지. 그러려면 이 악물고 운전연수를 받아서 운전과 주차 공포를 극복도 해야겠다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홀로서기를 실행하게 해주는 것이 남편이라는 것에 같지 않은 감사라도 해야 할까.


 


한때는 아니 많은 날을 남편을 만나는 날이면 머릿결까지 바뀌던 나였는데. 지금의 갈등과 마음은 당연히 극복해나갈 의지가 있다는 가정이 있었지만, 영원할 것 같던 나도 변하고 남편도 변한 것 같아 씁쓸했다. 워낙 화목한 가정에 대한 희망과 의지와 기대며 자신이 대단했었고, 그만큼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했었던 나기에,

남편도 남편이지만, 내 심리 변화를 바라보는 스스로에 대한 상황 자체가 실망적이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지.




처음인 게 많았던 2박 3일의 비가 오는 제주 일정은 크게 동부 해안 쪽을 중심으로, 어떤 바다 - 바다동물체험장 - 아쿠아리움 - 김녕해수욕장 - 함덕 해수욕장 - 에코랜드 - 제주동문시장구경 으로 마무리됐다.

가는날의 함덕해수욕장




어느 정도 손으로 조작이 가능하고 생각과 말이 가능한 5살 아이와 함께하니, 우리도 모르게 자연적인 여행지에 가서도 아이 위주의 체험을 찾아 가게 됐다. 다행히 모든 게 낯설면서도 그래서 더 아름답고 신선했다. 여행의 덕인지 육지에서도 먹을 수 있는 생선도 귤 하나도 더 맛있었다. 그전에 어른들이랑 갈 때는 아주 당연하게 들러서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던 성산일출봉이니, 섭지코지니, 서귀포니 하는 것들은 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성산일출봉만 멀리서 볼 수 있는 정도였다는 게 좀 웃기기도 했다. 당연해 보이던 것도 쉬이 할 수 없는 여행이었지만, 쨌거나 모두가 제주의 것들이었기에 좋은 것들이어서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아쿠아리움에서 바라만, 본 성산일출봉. 나름 이것도 좋았다..




 이 모든 여정이 마음과 말 행동까지 깨끗했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그랬을 순 없는 거였을까. 제주가 너무 아름다워서 내 아쉬움이 더 슬퍼졌다.




한 달, 아니 실제로는 2년을 넘게 고대했을 제주는 사진보다 더 아름다웠는데, 2박 3일은 지나고 보니 일상처럼 이미 흘러가 있었다. 아이의 목적은 달성했고, 세 식구 모두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것만으로 감사하기에는 어둑한 마음이 가득한 난 간사했다.

청주도착 후의 하늘








추신.


 많은 분들이 보는 곳에 이런 글을 쓰는 게 좀 망설여졌고, 그 전 글에도 좋기만 한 여행을 기대하고 바라 주셨을 분들이 많았는데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기대와 응원에 미치지 못해 부끄럽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글은 확실히 다소 극적인 감정이 담긴 것 같습니다. 더 먼 훗날 보게 되면 이렇게 극한의 감정을 오갔던 저의 모습이 나름 젊은 날의 객기나 더 나은 어른으로 가는 잠깐의 씁쓸했던 기억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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