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해연 Jun 30. 2022

아이의 장난감과 우산

복된 육아의 길에서 나를 보다

  아침 9시 반에서 10시 사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 내 손은 누가 봐도 아이의 엄마임을 증명하는 물건으로 차있다. 대부분은 미니 자동차로봇(헬로카봇 시리즈)이고, 어떤 날은 문어모양 찐득이(그 안에는 개구리알 모양 미끈이로 차있는데 전체를 꽉 쥐면 느낌이 징그러운데 자꾸 하고싶다.), 오늘은 우산이었다. 카봇이 그려진 투명우산.

미니헬로카봇과 문어찐득이



나는 아침형 인간은 아닐뿐더러, 부지런과도 거리가 멀어서 8시 52분에 아파트 단지 안으로 오는 어린이집 통학버스는 거의 타는 날이 없고, 본 수업이 시작하는 10시 커트라인(거의 9시 40분~50분)에 겨우 맞춰 데려가기 바쁜 엄마라 매일이 시작부터 부산스럽고 아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애엄마인걸 티 내며 갈 수 있는 이 시간, 이 길, 이 손이 나쁘지 만은 않고 조금은 좋기까지 다.


 

 어린이집에는 개인 장난감을 가져갈 수 없는 원칙이 있다. 이 아이가 세 살 때부터 얘기해 주긴 했는데, 그전에도 장난감으로 생떼를 핀 적은 거의 없지만 5살이 된 후에는 등원 길에 하나씩 골라 작은 손으로 소중히 도 꼭 쥐고 가던 장난감을 어린이집 앞이나 등원 버스 앞에서 엄마인 내 손에 먼저 쥐어주는 이 아이의 행동이

기특하고, 곧 고맙고 이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저런 아이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반응하고 있는 엄마가 된 내 모습도 기특하고 신기했다.  


 스스로 말하는 게 새삼스럽기도 하고, 엄마나 아빠가 된 사람이라면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일상이 그저 당연하고 마땅하기도 겠지만, 10년 단위로 세대를 달리할 때마다 은근, 아니 대놓고 한 템포 느리게 적응하는 나를 보면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한 것이다.  


 느린 적응의 같잖은 예를 들자면, 스무 살이 돼서는 중반 무렵까지도 고등학생 시절을 그렇게 그리워하더니, 서른이 돼서는 그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동안 지가 20댄 줄 알았다. 다행히 서른넷이 된 지금은 삼십 대임을 완전히 인정한다. (20대는 확실히 아닌 걸 알 수밖에 없는 흔적이 나와 우리에게서 마구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을 했고, 고심 끝에 기쁨보다도 조심스럽고 어색한 마음으로 아이를 잉태하고 낳아서 기를 수 있었다. 1년 이상을 남편과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천천히 이야기하고 마음을 준비했음에도 정작 임신의 시작과 끝 어색함 투성이었다. 심지어 미지의 공포였던 극한의 출산고통을 마주해서 아이를 낳았음에도,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도 내가 엄마가 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현장 내지 현실 바로 적응은 언제쯤 하는 나일까.)  


 아이를 낳았으니 육아는 어떻게든 하긴 하는데 엄마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일이 너무 어색해서, 아이한테도 엄마가~이런 말은 처음부터 잘해주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아이를 낳은 친구를 만났는데,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굉장히 당연하게 이미 준비된 사람처럼 엄마란 호칭을 하고 아이를 대하는 여유로운 태도에서 얼마나 놀랍고 멋지던지.)


다행히 어찌어찌 나름의 노력과 희생으로 엄마 노릇을 하고 있자니, 엄마라는 호칭을 듣는 것도 아이나 타인에게 내가 먼저  나를엄마라 칭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아마도 아이가 아주 많이, 과장 안보태서 천만번도 더 나를 엄마라고 불러준 덕일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되짚어보면 5살 아이가 신생아 시절, 심지어 그 전의 홀몸이었던 조차 생생한데, 나라는 사람은 임신 시기까지 포함하면 만 5년이 넘는 세월을 엄마의 모습으로 살다. 작년부터는 친한 친구들 중에서도 출산하거나 임신하는 경사를 함께하다 보니 그 가운데서 우리 아이가 완전히 형아가 돼있는 것을 보고 나와 아이가 부모와 자식으로 지낸 시간이 꽤나 오랜 것임을 체감했다.  


 당연히 요즘은, 나에서 아이와 관련되지 않은 일상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 됐으니까 엄마로서의 일상도 꽤 많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렇지만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나는 뭔가 더 착착 철두철미하고 유능한 엄마보다, 그냥 좀 느긋그러려니 하는 홀로 일 때의 나에 아이에 대한 관심과 신경, 일상 전반에 대한 불안감이 가미된 정도의 어설픈 엄마다. (그런데 문장 초반에 아직도 라고 썼듯이, 시간이 지날지라도 철두철미에 빠릿한 엄마가 되진 못할 것 같다. 지금에서 어린이집 등원 버스를 여유롭게 탈 정도의 부지런만 챙길 정도만 바라고, 그 이상의 착착척척 엄마는 이번 생은 글렀다(웃음). )


  

 어쨌거나 이렇게 어설픈 내가 어느순간 좋은 기회로 뒤돌아을 때, 자연스러운 듯 당연한 엄마의 모습고, 아이와의 삶을 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손에 쥐어준 장난감과 우산을 보며 느껴버렸다.

장난감을 이어받고, 로봇 우산을 쓰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이토록 감사하고 귀여운 기쁨을 느낀다.


 장난감을 고 오는 일은 생각해보면 아주 많았는데,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진 게 2번 정도 있다가 결국엔 오늘 로봇 우산을 든 것에서 귀여움이 한도 초과되어 글로 옮길 수 있었다. 이른 시간 출근하지 않은 조금은 꼬질한 엄마의 모습이 아련하기도 했지만 귀여움이 동반되는 요상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 우천 등원 길은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홀로 오는 길에 어른 우산이 아닌 아이 우산을 쓰고 오기가 처음이었다.  

번 쓰지 않아 잔기스 없고 짱짱하게 깨끗한 우산 비닐과 로봇그림 사이로, 

고개를 조금만 들면 보이는 하늘과 구름과 비가 흐렸지만 환했다.

짱짱한 우산 비닐과 카봇과 비오는 하늘과 구름과 비


 그 모습이 예뻐서 그 아침에는 가다 말고 사진을 찍었고, 이 밤에는 글을 썼다.



 




* 사실은 이상하게 울적하기도 했던 마음도 쓰려고 했는데 그 얘기는 다르게 쓰기로 하고, 좋다에 가깝게 귀여웠던 마음 위주로 써봤습니다. 그전에 기억은 주로 심오한 마음을 글로 옮겼었는데, 그 과정에서 무거운 감정이 더 깊어지는 기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쁜 마음도 글로 쓰니 기쁨이 배가 되고, 시선이 환기되는 경험입니다.

역시 잘, 에 집중하지 말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글을 써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심심하고도 진심인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5살의 스타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