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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l 21. 2022

아이의 기도손

복된 육아의 길에서 나를 보다

 지난 몇 주간 아이가 아픔에 따라, 내 심신은 더 피폐해지고 난 후에야 이번 주는 꼭 성당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꽤나 열정적인 활동들을 오래 했음에도, 신이 보기엔 배은망덕이자 어이가 없겠지만 활동이 끊긴 내 삶은 무신론자의 삶에 99프로 일치했다. 1프로를 남겨놓은 이유는 가끔 오늘처럼 마음이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신과 가까워 보이는 장소인 성당을 찾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난주 일요일 아침 성당을 향했다.


미사를 드리러 간 이유는 나도 몰랐다. 뭐 신에게 대단히 청하는 마음도 아니었고,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다. 아마도 미사 시간만큼은 좋든 싫든 성스럽든 지루하든 간에, 잡생각 없이, 조용히, 신앙의 전통적인 의식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그 고요한 집중이 필요했지도 모르겠다. 청주에 이사 와서 이 성당에 몇 차례 오긴 했었지만, 내가 알기로 스무 번이 채 되지 않는 정말 몇 차례만 왔었고, 그마저도 코로나가 터진 이후로 발길을 끊은 까닭에 여전히 낯선 곳에 다시 왔다. 이제는 아기띠가 필요 없지만 그래도 안기는 걸 좋아하는 17kg 5살 아이를 옆에 끼고.

주말에 그래 봤자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인데 아빠(진정한 비종교인)랑 좀 집에 있지, 결국은 그 짧은 시간까지 나를 쫓아 는데, 아쉬운 듯하면서도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나는 아이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줄 거지만,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에게만큼은 무신론이니 마니 하는 복잡한 생각 말고 단순하고 순수하게 모든 영성까지 끌어모아 신의 은총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에 첫돌을 맞이 할 때쯤 유아세례를 받게 해 주었다. 그것 때문에 비종교인인 남편도 성당에 오게 해서 나와 혼인 교리며 혼인성사까지 받게 했다. 그렇지만, 세례를 받은 후 신앙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건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아이는 성당의 존재를 잊을 것도 없이 알 시간이 없었다. 솔직히는 나의 그동안 피폐해진 정신을 차분하게 하고 싶었던 거지만, 그 와중에 아이에게도 성당의 고요함과 엄숙함 안에서 신의 축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쫓아온다는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유아실이 아닌 일반 성전에 앉았다. 아이가 완전히 차분해 주진 않겠지만 5살이 되었으니 충분히 미사의 조용한 분위기를 알 것이고, 이야기를 해주면 분명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도 한번 성당에 아이랑 오긴 했었는데, 저녁시간이기도 했지만, 기가 막히게 신부님 강론이 시작되자마자 완전히 코를 골며 뻗어버려서 집에 왔었다. 이번에는 아침시간이라 그런 일은 없겠지 슬쩍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분명 성당에선 조용히 기도하는 곳이라고 이야기를 해두었지만 소란을 피우진 않을까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다행히 분위기를 알고 나름 미사 의식에 참여하려는 모습이었다.

미사 시작 전 전례자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나는 두 손을 모고, 서로 멀찍이 앉았지만 아이를 둘러싼 앞 뒤 옆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이 아이가 손가락을 다 편 크기가 내 손바닥보다 작은 그 손을 모아 기도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가만히만 있고, 이 분위기만 느끼기를 바랐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해서 기도손이라던지 앉았다 일어났다한다거나 하는 들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혼자 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귀엽고도 기특하던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은 그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혼자 좀 있어보고 싶었는데, 데리고 온 보람이 조금이지만 진다. 물론 감동의 아기 기도손은 몇 초 만에 흐드러 졌지만, 잠시라도 아이가 먼저 손을 모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는데, 모두가 기도하는 성전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꼭 기억하고 싶어서 글로나마 그때를 기록한다. 예물 봉헌 때도 자기가 해보고 싶어 하고, 성체를 모시러 나갈 때도 엄마를 잘 따라 나와 못 모시는 성체 대신 신부님 손길로 머리 위에 축복을 받았다. 그러고는 고사이에 다른 어른들과 내가 받아 입으로 넣은 성체(밀떡)를 보고는 궁금해서 뭐 먹었냐고 고개를 꺾어 내 얼굴을 봐가며 물어 싸는 모습도 귀찮지 않고 새로웠다. 성당은 늘 나 혼자였고, 친하거나 친하지 않은 남들과 함께 였는데 지금은 내 아들이라는 5살 껌딱지가 옆에 있는 광경이었다.


 

스무 살이 갓 지난 스무 할살때즘 성당에서 교리교사 생활을 시작했었다. 나는 주일학교에 잘 다니지 않았어서 교리 지식도 얼마 없었고, 가족들이 성당에 다니는 케이스도 아니어서 성당에 아는 사람도 많이 없었는데도 어쩌다 그렇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모습이 많은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성당을 다니던 아이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더욱 신에 대해 관심이 없고, 더 의심하고 신앙을 머리로 이해하려 했던 사람이었는데, 개구쟁이 말썽쟁이 혹은 차분하거나 착실하기도 한 모든 아이들 한테서 신의 존재를 느꼈다. 교리교사 생활은 때론 많이 고단했지만, 아이들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신의 영광을 느끼기에 차고 넘쳤다. 혹여 그 아이들이 짓궂은 짓을 하거나 말썽을 펴도 그랬다. 더 놀라운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는 세상 저리 가라 짓궂던 아이들이 커서는 그렇게 의젓해질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냥 내 눈에 모든 아이들이 다 이쁘니까 좋은 모습이 더 좋게 보이는 거겠지만, 실로 그랬다.  


 성당에 엄마를 따라와서 시키지 않아도 혼자 기도손을 해보는 5살짜리 아들을 보면서, 이아이도 커서는 억지로 성당에 다니더라도 그때 그 아이들처럼 신의 축복이 차고 넘치던 그 아이들같이 성당, 신앙의 품 안에서 마음껏 개구졌음 좋겠다는 소소한 욕심 같은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그 개구진 아이들 뒤에서 한결같은 믿음과 차분한 바람으로 자식들을 성당으로 보내주시고, 자신들도 신앙에 진실되셨던 그 부모님들처럼 나도 이왕이면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으로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아이에게도 그 축복을 꾸준히 빌어주는 부모가 돼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신의 축복을 빌어주듯, 많은, 아니 모든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신의 은총을 넘나드는 축복을 받는 존재가 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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