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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25. 2022

동생을 낳아주지 않는 엄마라 미안해

다이나믹한 육아의 길


 요즘, 아이에게 미안한 것이 생겼다.
동생을 낳아주지 않는 것이다. 정확힌 언젠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말이 트고 꽤 대화가 될 무렵이니 4살 이후인 것 같은데 먼저 동생, 아기의 존재를 이야기했었다. 이런저런 모든 이유로 외동 확정이었던 나는, 막상 내 아이에게 동생을 원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많이 묘했다.

 처음엔 단순히 아기가 갖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가 없으니, 대신 어린이집에서 만나는 아가 동생들이나 주변에 아빠 엄마 친구들의 더 어린 동생들을 예뻐해주자고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거 말고 엄마가(내 배를 가리키며) 낳은 아기."

4살 아이의 간절한 눈과 입의 표정과, 손짓에 놀랐고 당황했다. 엄마 껌딱지인 이 아이가 먼저 동생을 원한다는 말을 할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동생이 갑자기 왜 갖고 싶어 졌어?"
"내가 키우고 싶어서. 우유도 내가 먹여주고, 이렇게 안아주고 하고 싶어."

아니, 같이 놀고 싶어도 아니고, 키우고 싶어서라니. 이게 엄마 껌딱지 4살 아이의 머릿속에서 들 수 있는 생각인 건지 신기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생각과 말이 너무 예뻐서 감동받은 것도 맞다. 당황하고 감동받고 미안했지만, 이내 나는


" 신비가 동생을 갖고 싶은 마음은 엄마가 알았지만, 엄마 아빠는 신비 하나로 충분해. 아쉽지만, 우리가 다른 아기 동생들 많이 이뻐해 주자."


라며 아쉽게 위로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동생 이야기를 같은 이유로 말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4살 머리로 생각하기에도, 다른 집의 아기랑 우리 집에 있는 아기의 존재는 달랐나 보다. 자기가 아기를 봐야 하는 이유는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한 4차례 정도 얘기했을 때즘,


"신비야 근데, 너 아기가 나오면, 신비가 좋아하는 헬로카봇들 걔가 다 뺏어가고 다 침 묻히고 그럴 수도 있어." 그랬더니, 1초 고민하더니


"괜찮아. 내가 양보해줄게."


"그리고 아기가 나오면 당분간은 엄마 아빠가 아기를 보느라고 지금처럼은 신비를 잘 못 봐줄 수도 있어."  


또 1초 고민하더니

"괜찮아, 괜찮아."

고민하다가 꽤 현실적인 이유를 들면서, 동생이 생기면 지금처럼 누리지 못하는 것들, 혹은 싫어질 만한 것들을 나열해줬는데도 인간적으로 나름 고민하는 척하다가 '괜찮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나는, 간만에 찐한 생명의 신비를 느꼈다. 혼자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 가족의 애정을 모조리 받고 있고, 어린이집이나 가끔 엄마 아빠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아들 딸들과도 친구가 되고 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을 만큼 다른 존재가 필요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렸나 보다.




아이는 잊을만하면 아기 얘기를 했지만, 연거푸 내가 본인만으로 충분하다는 얘기를 어쩔 수 없지만 단호하게 말해서 한동안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받아들인 줄 알았다. 그러고는 5살이 되고도 여름이 된 요즘.
다시 시작되었다.

동생을 원하는 뽑기고민중인 5살형님

달라진 게 있다면 동생을 바라는 이유가 더 구체적이고 많아졌다는 것이다. 고사이 말도 늘어서 어른인 내가 들어도 나름의 논리가 느껴질 만큼.

어느 날은 자려고 누워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이제 진짜 자려고 눈을 감은 줄 알았을 때였다. 대뜸 일어나더니,


"엄마 아기 언제 낳아 줄 거야!"


그러는 것이다. 차마 대답할 틈도 없이 이어서


"아기가 있으면, 내가 우유도 주고, 쪽쪽이도 주고, 장난감도 주고, 응아 할 때 손도 잡아주고, 이렇게 발도 잡아주고 할 건데!"


여기서 포인트는 아기가 변을볼 때 손, 발을 잡아준다는 표현에서의 자세였다. 요즘 이 아이는 변을 볼 때 내가 손을 잡아주거나, 가끔 발도 잡아주기도 했는데, 이 자세를 정확히 구현해서 나에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나는 앉아서 정자세로 잡아줄 수 있지만, 5살의 몸은 아기의 발을 잡기 위해선 엎드려야 했는데, 자려다 말고 고양이 자세로 저보다 작은 아기의 발을 잡아주는 여전히 아기의 모습이라니.
5살의 몸뚱이로, 5살의 아직은 작은 그 손으로 더 작을 아기의 손과 발을 잡아주는 시늉이라니. 후

 이미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가, 더 작은 아이를 먼저 사랑해주고 이뻐해 주는 걸 떠나 보살펴 주는 모습이라니. 상상하는 모습만으로도 격하게 사랑스럽고, 또 감동스러웠다.


내가 조금만 더 무던하고, 그릇이 넓은 엄마였으면 많이 혹하고, 실현에 옮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이나마 혹한 정도가 그냥 상상조차 잠시뿐인 엄마라 이내 격한 사랑과 감동은 더 큰 미안함으로 번졌다. 죄책감까진 아니고 순수한 미안함이다.


나중에 후회하고 아쉬울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나는 둘째를 낳을, 아니 가질 생각도 없었다. 일단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지금 신비 하나로 충분했다. 신비가 동생을 이뻐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격한 기대가 되지만, 그 아기가 갖고 싶어서 낳을 생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첫째가 동생을 보고 좋아할 모습이 기대가 돼서 둘째를 가진다는 생각은 좀 미지의 아이에게 해서는 안될 생각이다. 막상 낳으면, 아이의 샘 부리기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동생을 생각하는 이 아이의 마음을 보니 동생이 생긴다면 둘의 모습이 정말 예쁘긴 하겠고, 지금 이 아이의 정서에도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엄마 껌딱지지만, 동생이 생기면 이 아이에게도 동생을 먼저 챙긴다거나 하는 마음이 들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며 자연스럽게 의젓해지거나 독립적인 모습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심지어 신비가 동생이 생기면 정말 잘해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꽤 들어서 더 혹했다.
 그렇지만 역시 이런 생각도 둘째를 가진다는 명목으로는 틀렸다. 둘째를 가지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유 없이 그냥, 그 둘째 아기를 보고 싶어서, 키우고 싶어서 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마음이 없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를 가지고 싶지 않은, 가지지 말아야 할 현실적인 이유는 더 많다. 나는 임신, 출산, 육아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겪을 생각을 하면 좀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서 치가 떨릴 직전의 정도로 자신이 없다. 지금 아이는 처음이었고, 혼자 있었으니 태교니, 여유 부리기니 이것저것 해보기라도 했지, 한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그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는건, 난 . 아니 안하고 싶다.


 물론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은 쉽지는 않지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되고 소중한 순간이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유의 복됨과 고됨을 모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못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여유 있진 않아서다. 쪼들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리고 나는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이상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은 포기한 사람이다. 나의 커리어에 있어서 엄청난 성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기존에 하던 일을 줄여서 경력과 내 직업적 자아를 유지하고 육아와 가사의 비중을 높일 계획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본래 강의 일은 파트로 하면서, 육아 가사 비중을 높이 해서 살아가는데,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름 만족스럽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 당연히 돈이 더 많이 들 거고, 주로 경제 역할을 하는 남편 그리고 나까지도 압박감을 많이 느끼게 되는 상황이 탐탁지 않다. 둘째가 생기면 그나마 유지하던 파트타임 일도 못할 가능성이 커지는데, 그것 또한 탐탁지 않다. 그렇다고, 나도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정도로 경제적 압박을 느끼는 상황은 더욱더 탐탁지 않다. 쓰고 보니 너무 나만 아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렇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랑 얘기했을 때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는 둘째를 가지면 안 되는 하고 많은 이유 중에 사실은 가장 큰 이유가,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부담감이다. 지금도 어딜 놀러 가서, 내 아이만 한 첫째, 혹은 그보다도 더 작은 첫째, 그리고 아기띠나  유모차에 매달려 있는 둘째 셋째를 키우고 있는 가족들 혹은 엄마의 모습을 보면 부럽거나, 이쁘다고 생각되기보다는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들까, 혹은 첫째가 불쌍하단 생각까지 먼저 든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없는 그들의 더 큰 행복은 감히 어찌 형언할 수 있겠냐마는.) 그런데, 남편은 만약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다면 둘째 정도 있는 거는 좋다는 의견이었다. 워낙 내가 앞서 말한 세 가지에 대한 부담감을 알고 있으니, 그 부분도 이해는 하지만 형제나 남매가 하나 있으면 나쁠 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도 주변에 꽤 많은 외동 확정 부모들과 얘기했을 때 가장 발목을 잡았던 부분이,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있을 아이의 모습이나 부담감이 무시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주 잠시 고민만 했지만, 고민은 고민으로 끝났다. 아이를 최대한 독립적으로 키우고, 부모가 된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늙어가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기로 하고.)
쨌든 남편과 나는 같은 외동 확정의 마음이긴 하지만, 둘 이상의 아이를 생각하는 온도차가 미묘하게 크게 느껴졌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오늘도 아이에게 동생 이야기를 들으, 느꼈던 미안에 대해서 쓸 참이었는데, 막상 둘째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보이지는 않는 생각이 아닌 글로도 써놓으니 둘째에 대해 생각했던 단 1초 만의 상상이 단호함으로 싹 가셨다. 대신 지금 아이에 대한 미안함은 가시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란 걸 안다. 남의 아이들은 둘은 모르겠지만 유독 셋, 넷이 있는 집들은 정말 좋아 보인다.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셋째는 셋째대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 있는데도 아이들의 성격과 매력이 천차만별인 게 엄청난 신비로 다가온다. 집에 우리끼리 있을 땐 그렇게 꽉 차보이는 데, 앞서 말한 그런 데 있다가 우리 아이를 보면 또 유난히 혼자 있는 것 같아 혹여 외로울까 씁쓸해지기도 한다. 또 그 셋을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단단하고 무던한 것 같아 부럽다.


분명 단호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솔직한 내 마음은 외동이 맞는데, 막상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걸 보니 거기서 오는 미안함에서 이런저런 생각만 극을 오가는 모양이다. 동생을 못 낳아줘서 아이에겐 꽤나 미안하지만, 그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랑으로 대신 나도 이 아이를 더욱 사랑하고, 나아가서는 이 아이와 함께 많은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그러면 될 것 같다.

고 합리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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