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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26. 2022

우리가 참 다른 줄은 알았지만

친구 티 이야기

내 친구 '티'는 서운할 정도로 죽음에 초연하다. 반면 나는 죽음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하다.

(여기서 죽음은 본인의 것에 한한다.)

엊그제였나, 집 앞 작은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티와 통화하면서 최근 내가 극복 중인 불안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그걸 듣던 티가 무심한 듯 하지만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좀 반반씩 섞이면 좋겠어."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가장 힘든 것은 필요 이상의 불안이었다. 불안에도 종류가 있지만 가장 힘든 건 코로나에 걸릴까 봐, 열이 날까 봐, 이런저런 이유로 아플까봐와 같은 아이의 건강과 직결된 것이다. 실제로 아이가 이번 여름에 병원에 입원을 하거나,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아픈 증상이 지속되면서 불안에서나 있던 걱정이 현실로 되는 걸 겪다 보니 어찌저찌 버텨는 냈으나 아이가 아플 때마다 불안은 더 극도로 치솟았다. 심지어 아이가 건강해진 지금조차 긴장을 완전히는 풀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육아 번아웃도 겹쳤고.


 다행히 지금의 불안을 '풀어야 할 문제'로 느껴서 극복하려고 애쓴다는 점은 좋은 거지만, 이왕이면 내가 처음부터 이것을 겪지 않는 사람이고, 엄마였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게 나의 욕심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이와 나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누군가 아프다는 소식은 꽤 큰 불안을 가져다줬다. 겪고 있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인지, 멀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이런 이야기들을 티에게 했고, 익히 그런 내 모습을 알고 있던 티가 말한 것이다


둘이 섞였음 좋겠다는 말에 당장은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감정이 격해질 때 주로 겪는 정서가 극도의 불안이고, 티는 죽음에 대해서 초연한 극단인데, 반반씩 섞자니. 최악인데 이러면서.  

도통 이핼 못하겠다는 듯 되묻는 나에게 티는 설명을 이어갔다.  


" 잘 들어. 안 좋은 걸 섞자는 게 아니라, 서로 반대로 보면, 너는 극의 불안으로 힘들어는 하지만,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죽어야겠다든가, 죽고 싶다든가,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잖아. 이건 너도 알겠지만, 우울과는 다른 문제야. 난 우울하지 않음에도 이런 생각을 가끔 하잖아. 넌 그걸 이해 못 하고."


"아.. 그렇지. 그렇네."


"그런데 반대로 나는 너가 평소에 겪는 그런 불안이 전혀 없. 너는 어렸을 때부터 누구 아프면 엄청 불안해했었는데, 나는 누구 아프다고 해도 그런 게 없어. (실제로 그랬다. 누가 아프면 적당한 걱정이나 조치는 취하지만 평정심을 잃을 정도로 불안해하는 건 커녕, 차분했다. 난 그 모습이 부러웠고.) 그러니 지금 느끼는 이 마음이, 딱 내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 이해 못 하는  마음의 종류인 것 같아."  


"헐 맞네, 맞네. 그 부분을 반반 섞으면 딱 좋겠네. 이해됐어."



우울은 과거에서 오고, 불안은 미래에서 온다고 했는데, 나는 정말 먼 미래도 아니고, 당연히 잘 지나갈 하찮은 것들을 닥치기도 전에 걱정하고 또 불안해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쓸데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것을 훅 하고 놓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친구는 이 부러운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탑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티는 많이 나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뒤숭숭할 때면 꿈에서 조차 극단적 선택을 서슴없이 하려는 걸로 괴로워했고, 그걸 듣고 있는 것 밖에 못하는 나는 걱정하고 불안했다. 반면 꼭 힘든 상황이 아니어도 몇 살까지만 살고 싶다마니 하는 등 죽음에 대해서 섭섭하리만큼 초연하게 얘기하는 티를 보며 나는, 걱정은 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아깝게 왜? 이러면서.  


 

각자가 극복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만큼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이 알고보니 바꿔서는 사소하게나마 걱정을 해본 적도 없을 만큼 신경 쓰지 않는 영역이었고, 그렇다는 것은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굉장히 잘 해나고 있는 반증이었다. 그런 좋은 모습에서만 우리 둘을 섞으면, 탄탄한 자의식으로 삶을 즐기며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삶에는 오지도 않은 미래를 쓸데없이 걱정할 시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것이다. 설사 크고 작은 시련이 와도, 딱 적당한 현실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남편보다 내편인적이 많은 친구 티가 보내준 꽃,과 말.

티의 답은 그거였다.   


티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가 많이 다른 성향임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친해진 거지 싶은데 돌아보니 친해져 있었고, 뒤돌아보면 친하다고 생각하던 그때는 지금보다 덜 친해졌던 시기로 여겨질 만큼 지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섰던 꼬맹이 티와 뒤에 가까이 섰던 적당히 큰 중1의 우리는 이제 같은 키가 됐다. 스물넷도 10년 전일만큼 34살이 되고서도 우리 둘이 참 다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다른 중에 나름의 강점들이 있다는 것을 요즘 티를 통해 문뜩문뜩 깨닫고 있다. 여전히 삶이 평화보다는 전쟁에 가까운 것들이 멈추지 않지만, 수많은 날 불티나게 욕을 하고 제3자인 서로에게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쌓은 내공을,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는 친구 티의 무심한 통찰력에서 느다. 아쉽게도 그 통찰력들이 바로바로 서로에게, 삶에 적용되는 것은 기적에 가깝지만, 전혀 힘주지 않는 그 말에서 잠시의 위로나 희망 같은 것들이 왔다.


그 잠시가 정말 잠시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글로 옮겨 본다.




추가) 이 강씨인 구 티에게 너와 관련된 얘기를  쓴다고 나름 허락을 받으려 얘기를 하던 중에 티가 이런 말을 했다.

"야! 너 필명(기존:강해연) 양작가로 바꿔. 정확히는 양치기작가. 올리기 바로 직전에 얘기하라고. 맨날 글썼다면서 바로 올라온 적이 없어."

"알았어.^^ 진짜 양치기 맞네 나 .. "

"그리고 야, 강은 아무한테나 붙는 줄 아냐? 나나 우리아빠같은 사람들한테나 강씨 붙여 주는거야."

"..인정"


강해지잔 뜻에서 필명의 성을 강으로 바꿔보았는데, 영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양치기 양이지만 강인한 친구 티처럼 강할 강자 보다는 보기엔 순한양 양씨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물론 양도 화나면 들이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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