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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Sep 20. 2022

엄마된 내가 자유를 대하는 자세

엄마의 길에서 나를 보다

 홀몸 즉, 아이를 가지기 전의 나일 때도 쉴 때면 뭔가 알차게 지내야 될 것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쉬었다. 알람 없이 아침을 내리 자고 일어나서도 한참을 뒹굴거리다가 이제 뭣좀 해야지 하고 일어나면 오후 4시일 때도 있었다. 주말 중 하루까지 풀타임으로 일하고 난 뒤에도 쉬는 시간조차 잘 지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못했다고 해서 매번 죄책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고 난 다음의 나는 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막상 주어졌을 때에 온전히 내 것에만 집중하는 것조차 못하는 모습이다. 어느때보다 늘어지게 자유로워야 할 시간에 조차 압박감이 생기고, 그것을 뜻대로 지내지 않았을 경우에 그것은 죄책감과 자책이 된다. 자유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이를 낳기 전과 후로 비교할 게 안된다는 얘기다.  


아니, 그냥 좀 쉴 때 툭 놓고 잘 지내면 되지 이게 안되나?한심도 싶겠지만, 솔직히 그렇다.  


 


 요즘에 나름 꾸준히 해보려고 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순간에도, 이 시간이 끝난 다음 집에 가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써놓고 시작해야 마음이 편하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기 싫어서 전화를 무음으로 해놓는 행위는 저세상 일이다. 어린이집이든 친정이든 시댁이든 아이가 있는 곳에서 전화가 올까 봐 노심초사하며 늘 짤막한들 간절했던 자유를 스스로 긴장상태로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불안감으로 마음이 한창 혼란스러울땐 그 어느때보다 자유로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아이랑 있는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나는 예민한 엄마입니다'(송희재 지음)라는 책에서 저자 이렇게 말했다.  

엄마라고 불리는 우리 대부분은 아이를 잊고 자신의 삶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 매몰차지도, 자신을 잊고 아이에게만 몰두할 수 있을 만큼 희생적이지도 못하다.  

라고 자그마치 프롤로그 첫 문장에서 그랬다. 작가는 나와는 비교가 안되게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감을 즐겨서 아이가 태어나는 게 아쉽게 여겨질 정도로 육아 감수성이 뛰어난 분이었는데도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을 문장으로 띄웠다.  금 내 글과 맥락이 다른 듯도 하지만  마침 밑줄쳐놨던 저 책과 저 문장이 생각이 났다. 아이를 잊고 몰두라는 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마음이 많이 머무는 문장이었다.



 내가 자유의 시간에 뭐라도 하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하는 게 없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지내다오 해서 어린이집에 등원한 평범하지만 가장 행복한 날에는, 혼자 밥 한 끼 대충 챙겨 먹고 조금만 쉬어야지 하는 게 2시간을 12분처럼 쉬다가 겨우 집안일을 끝내고, 겨우 책을 조금 보거나 글을 쓰다가 빠듯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두 시간 정도 학원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출근한다. 밤 10시가 한참 넘어야 육아가 끝나면 아니(육아란 아이가 잔다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 아이가 밤잠에 들면 나도 거의 동시에 자기 일쑤다.  

 이상적인 계획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자마자 끼니를 때우면서 미국 드라마를 보며 잠깐 쉬고, 밥을 치움과 동시에 집안일을 시작해서 1시간 이내로 마무리하고 30분 정도 운동을 한 다음과 내 몸 씻고 단장까지 마무리하는 것. 그러고 주어지는 3시간 정도를 굉장히 여유 있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어공부까지 하는 게 내 소소한 바람이자 목표인데 이걸 지키는 날이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오늘도 뭐 그렇지 뭐~ 라며 자책하고 빠듯하게 산다며 푸념하는 것을 들은 친구 티가 또 한마디 했다.  


"아 됐어~! 야! 목표 세우지 마! 목표를 세우니까 네가 못한 것도 생각나고 그러지. 그냥 쉬어! 쫌 자! 자기 계발하지 마. 뭘 자기 계발이야. 이미 충분히 많이 하고 있어. 청소도 하지 마 그냥 쉬어 내비둬!"


 자기 계발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건 어울리지 않고, 그냥 나는 자유시간만큼은 알차게 하고픈 것들을 해야겠였는데 여기에도 '하고 싶다''해야 한다'가 이겨버리니 약간의 제동이 걸리는 듯했다.  티의 말로 단순히 내가 위로받으려는건 아니다. 이제는 집안일 온전히 하지 않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확 그럴수있다 싶진 않아도 일단은  말을 들었고 멈춰서 가만히 새겨보게 됐다.



 그런데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이런 필요 이상의 조급함, 긴장감이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나보다.  '엄마만 느끼는 육아 감정' (지은이 정우열)에서 아이 둘의 아빠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작가는 이렇게 얘기했다. '예측 불가능함이 엄마를 조급하게 만든다'라고. 교감신경이 위급한 상황에서만 흥분되어야 하는데 엄마로 살다 보면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교감 심경을 수시로 흥분시키는 일이 흔하다. 이어서 엄마는 매일 긴장으로 인해 불안하다고.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절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가장 좋다는 것은 다 알지만 아쉽게도 엄마의 삶은 소박한 그 꿈마저 허락되질 않는다고. 그나마 아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엔 그 긴장감을 잠시 내려놓을 기회가 찾아오지만 그 시간의 끝을 결코 예측할 수 없기에 소중한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또다시 긴장이 반복되곤 한다. 고. 했다. (출처. 엄마만 끼는 육아 감정. 정우열 / p.33~35)


내가 겪은 일들을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이 문장으로 정리해주고 그것을 다시 내가 다시 읽는 과정은 복된 일임을 느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만족스러운 건 많지 않지만, 그래서 잘도 아니지만 

'해'나가고 있다. 고.


과거에 나는 아니다 생각되는 건 생각보다 끊어내길 잘하는 사람이었다. 일도, 사람도 그랬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아니지만 피 튀기며 싸울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랬다. 그게 편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선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해서 나를 지킬 수 있다면 필요 이상의 감정이나 체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엄마가 됐고, 육아나 가사에서 끊어내고 피하는 건 어떤 해결책도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운 이래 한 번의 포기도, 물러섬도, 회피도 없이 정면돌파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육아 감정에 살짝 제동이 걸린 번아웃 시기를 조금씩 지나 있다. 그렇다고 뭘 얼마나 '잘'할 생각은 없다. 노력은 하되 자연스럽게 지내보기. 나를 기다려보기.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해 내보기가, 목표가 아닌 희망이고 생각이다.

 이루고자 하는 시간도 정해두지 않는다. 감히 정할 수도 없을뿐더러 정한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친구 영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우리가 육아나 가사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우리 엄마들 세대에 비교하면 진짜 하찮은 거기도 한 건가. 하다가 우리 세대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딱 과도기의 세대인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다. 얼마나 이 아이들을 우리 어릴 때 보다의 나은 가치관, 바른 행동을 하는 인격체들로 키워낼 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뒤에서 엄마인 우리들은 얼마나 성장하고 선구된 엄마로 서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생각과 고민과 무겁다고 여겨지는 힘들을 고 노력할 건 하다 보면, 우리 전 세대 그리고 자식이었던 우리보단 나은 길로 나가고 있지 않을까.


 어느 순간 나를 돌아봤을 때 방울의 지혜와 여유정돈 생겨 있지 않을까.


설명할 순 없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오늘 밤에도, 내일 낮에도 몇 문장을 읽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고,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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