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해연 Mar 16. 2023

죄악이라는 착각

삼십대 성장기

 게으름이라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메시지가 확실해 보이는 책이었고, 아무래도 나는 정말 게으른 과의 사람이 분명한데 그냥 이미 읽고 있다. 뻔한 자기 계발서의 내용이 아니기를. 그냥 괜찮다는 위로하는 내용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게으름이라는 착각이란 제목이 끌렸던 이유는 게으름 자체보다도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죄책감이었다.  

 "얘는 매번 빠릿빠릿하질 못해. 단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어. 미리미리 좀 못하니?"  

등의 말들을 들으며 사는, 실제로 나는 느리고, 잠을 좋아하고, 계획과는 거리가 먼 잠만보 같은 애였다. 누가 뭐래도 누워서 잠자는 게 특기인 잠만보처럼, 나도 온전히 부모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꾸준히 게을러 보이는 아니, 게으른 사람으로 살았다. 적당히만 열심히 살았단 뜻이다. 그런데 이 적당한 열심히가 늘 게으름 같이 느껴지고 온전히 부지런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 순간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인식했다. 이어서 브레이크를 걸고, 자책을 내 삶에서 제해보자던 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게으르게도 산 것도 아닌데, 왜 세상과 엄마는 내가 끊임없이 부지런해질 것을 종용하고, 심지어 나는 스스로조차도 떳떳하지 못했던 걸까.  


 어른만큼이나 딱히 피곤할 일이 없는 초등 고학년 때부터 나는 누군가(주로 엄마)가 날 깨우기 전까지는 12시도 훌쩍 넘어서도 잘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쪽잠을 자며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고, 3,4시간을 자고도 일상생활을 턱턱 것도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해낸다는 영웅담이 많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한참 들을 때는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애초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치의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나는 알람이 5분씩 열 번을 울려도 일어나지 않자 부모님도 포기하고 학교에 제대로 지각해 버리는 적은 있어도, 단언컨대 살면서 알람이 울리는 한 번에 일어난 적이 5손가락에도 들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학창 시절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더 가관이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나는 밥 먹고 멍 때리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드라마나 기깔나게 웃음 나는 코미디를 보며 쉬기 바빴다. 세월이 지나도 쏟아져 나오는 성공담과 카드뉴스만으로도 읽을 수 있었던 자기 계발서에는 깨어있는 시간을 나를 가꾸는 그놈의 계발에 쓰는 방법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나도 해야겠다. 해야지, 하면서 진심으로 내켜서 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쉬면서 맘이 온전히 편하거나, 떳떳한 적도 없었다.  


 아마 중학교 때부터일 거다. 무얼 해도, 못해도 늘 죄책감이 따르던 날들이. 중고등학교 때는 거의 학업에 관한 거였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처음으로 평균이 90점이 넘던 날. 그때 나는 유일하게 죄책감에서 멀어진 듯했다. 10대 인생 통틀어서 공부를 안 한 날 보다 공부를 한 날이 더 많은 건 분명한데, 나름 새벽부터 공부하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한 나날들이 많았는데, 시험 성적이 좋을 땐 '아, 이거보다 더 빨리 시험준비를 시작했다면, 더 많이 공부했다면 더 잘했겠다.'는 생각이, 성적이 나쁠 땐 '성적표를 어떻게 숨길까, 어떻게 조작할까'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대한민국의 흔한 수험생으로 모두가 그런 듯 열심히 공부는 했고, 그 공부와는 상관없는 듯해 보이는 논술수시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지방캠퍼스였지만, 네임밸류가 있는 데여서 엄마가 엄청 좋아했다. 그렇게 대학을 시작으로 학업의 죄책감에서는 벗어나는 듯했다.   

 대학생활은 학업과 거리가 멀었다. 아마 부모이혼이란 우울감이 얕은 집중력과 아예 학업을 하지 않아 버리는 반항감으로 나오는 시기였다. 자주 수업에 결석했고, 심지어 시험날 그러기도 했다. 반항과 옳지 않은 행동에 자발적되어봤다. 듣기로 어떤 애들은 학사경고를 맞아도 당당하다든데 나는 아니었다. 열심히 한 게 없으니 기대나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끝에는 옅은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주말에 젊은이 하면 그 흔한 클럽과 술과는 거리가 멀었고, 투덜투덜하면서도 성당에서 밤을 새우며 활동을 자원하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모든 주말을 청소년 자원활동에 헌신적으로 살기도 했다. 경기 부천에서 서울 강동까지 편도 약 2시간의 거리까지도 봉사활동을 거리끼지 않던 나였는데. 따지고 보면 크게 죄진 것도 막 산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불만이었고, 해야 할 것 들만 많았을까.  


 자발적으로 공부에 열심이지 않았고, 엄마도 아빠도 완전한 노터치였으니 나는 그렇게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도 가끔 대학시절로 돌아가서 중간고사 전에 공부가 하나도 안 돼있어 끙끙거리거나, 숙제를 못해서 당황하는 꿈을 꾸다 딱 그 혼란이 극을 칠 때 눈을 뜨곤 한다. 더 나아가서는 대학 졸업을 아직도 못한 꿈을 하도 많이 꿔서, 진짜로 내가 대학을 졸업을 못한 것인가 헷갈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졸업장을 그냥 거실 한 복판에 걸어둬야 하나 꿈이 깨고 나서 잠깐 고민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꿈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10대까지는 착실한 느낌에 가까운 학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 때 잠깐 막 나갔던 그거 하나로 내가 어렸을 때를 통틀어서 숙제와 공부와는 아주 먼 애였다고 사실이 왜곡될 지경이었다. 결국 또 죄책감이었다. 심지어, 난생처음으로 자발적 반항이었던 반공부라는 행위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무의식에 뿌리내려 잊을만하면 꿈에 나타나 주시니, 실로는 굴레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 뿌리 깊게 박힌 것임을 확인한 셈이다. 이쯤 되면 죄책감이 아니라 죄악감이란 게 어울리는 인생 같다.


 어느덧 나는 사회인이 되고, 결혼을 했고, 서른에는 엄마도 되었다. 공부가 과제는 아니니 죄책감에서 멀어졌냐고? 육아와 내 생활 사이에서 죄책감이란 건 마치 더 정당한 듯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려던 참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것도, 내가 아닌 다른 가족이 아이를 보게 하는 것도, 아이가 아픈 것도 다 나에게서 탓을 찾거나, 탓이 아니라면 애써 그게 아니라고 끊임없이 나를 다독여야 했다. 작년은 그런 잘못된 죄책감류가 판을 치는 끝판왕의 해였다. 아이는 다섯 살이 됐고, 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내가 일을 하러 가지 않는 날이면 집안일을 대략 해놓고서도 자유시간이 확보되는 시기였다. 그 시간이 너무 간절해서 유독 작년은 미용이나, 수다, 운동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잠이 제일 좋은 잠탱이는 잠을 잘 시간을 아껴서 주로 글을 읽거나 쓰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간절했던 시간을 온전히 하고픈 것에 집중하는 그 시간, 하긴 했지만, 왜 내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이게  틀린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서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친구 T한테 하소연했다.  

 "야, 그게 바로 가 제일 싫어하던 엄마의 모습이야. 당장 때려치워."  


 저 정도였나. 다른사람의 언어로 들으니 정신이 버쩍 차려지는 것이었다. 엄마는 60도 훨씬 더 먹은 나이인데도, 자기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모습이 나는 너무 싫었다. 결혼을 하고서는 온전히 나와 동생, 집안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 애들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한 명은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는데도 필요 이상으로 더 뭘 해주지 못해서 안달인 그 모습이 참 싫었는데. 친구의 말을 때려 듣고 나서 깨 딱했다간 나도 저지경까진 아녀도 비슷한 꼴이 날 수도 있겠단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이란 썩은 동아줄이, 그 썩은 동아줄이 끌어온 불안이라는 쓰레기를 이제는 좀 봉지에 꼭 싸매서 버리고 싶었다.  이제야 그 마음이 들었다는 게 좀 억울하긴 하지만 뭐 어때.   

출처.pinterest

 이전에 죄책감에 대해 가볍게 썼던 글을 읽고서 그 당시 같이 글을 쓰던 분들 중 2,3명이 연거 

"근데 해연님, 자책이 너무 심해요."라고 평을 해주셨다. 그 자책의 순간을 쓰고 싶어서 그렇게 썼는데, 내 생각 이상으로 '잘못'될 정도로 심했던 것이다. 동시에, 친구 T가 했던 말처럼 분명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연속으로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동안 늘 그랬듯이 내 삶을 바라보는 동안 내에서 많은 부분에 녹아나 있던 자책에 대해 제대로 마주해 보기로 했다.

오늘이 그 처음이자 마지막 최대치라고 본다.

작가의 이전글 새옹지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