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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n 27. 2023

잃어버린 양말들


저번 주 일요일 밤이었다. 주말부부의 짧은지 긴지 모르겠지만 짧은 듯한 주말을 지내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남편이, 신발까지 신은 현관 앞에서 애써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한숨 뒤에 말을 듣기도 전이었지만 난 그 얘기가 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부탁인데, 님아 제발 그 입을 다물어 주오.

"인간적으로 여기 좀 치우자."
"..."
"그리고 거기 화장대 옆 책이랑 잡다 구니 쌓인 거 봤어?"
"..."
"이러다 신비(아들)가 원래 집이란 게 이런 건 줄 안다니까?"

가는 마당에 왜 저럴까 싶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가만히 있었더니 받아주는 줄 알고 미친 잔소리가 한마디로 끝나질 않았다. 나는 그걸 단 네 글자로 끝내고 싶었다. 찰지게 눈까지 부라리며 뱉어줄 자신이 있었다. "ㅇㅇ,ㅇㅇ." 너무 상스러워서 차마 글로 쓸 수 없는 그 네 글자를 당신은 가늠해줄 수 있을까. 끝내 그 말을 큰따옴표가 아닌 작은따옴표로 마친 것은 잘한 일이려나. (힌트를 주자면 쉼표 앞은 비속어고, 쉼표 뒤는 쌍욕이다.)

실은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정리에 있어서는 평균 이하 정도가 아니라 밑바닥을 기며 사는 수준이고, 남편은 적잖이 깔끔한 스타일이라는 것을(그런데 남편이 어디 가서 자기 깔끔하다고 하지 말랬다. 자기는 그저 정상일뿐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우리가 집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이 되기로 했다. 정리 밑바닥 인생이지만, 그래도 주제는 알고 있어서 남편이랑 있을 때만큼은 집을 정돈해 생활해 보자며. 정리를 '잘'은 아니어도 '하는' 인간이 되자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산 결과 내 기준 그 당시 신혼집은 너무 깔끔해서 내 집이 내 집같지가 않았다. 누구나 언제든 우리 집에 온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좋게 말해 아늑한 이지 셋 이상이 거실에 있기에는 좁은 집이었는데 누구든 계속 우리 집에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평화는 잠시뿐, 남편은 알고 보니 깔끔한 정도가 아니라 정리요정이었고, 요정도 진화해서 요괴가 되어가는 듯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지만, 수건을 개키고 수납하는데 정확한 틀이 있다는 것을 남편을 통해 알아버렸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스물여덟 먹고 그런 것을 알게 된 것을 고백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또 굳이 그 방법을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아주 기본이라고 하는) 수건 접기 및 수납법

1. 직사각형 수건을 정사각형이 되게 반 접는다.
2.(여기가 중요하다. 이 부분을 나는 몇 번이고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접힌 부분 말고 천이 여러 겹 쌓여 두꺼워진 부분이 안쪽으로 오게 한 뒤 삼등분을 해서 접어야 한다.
3. 완성된 수건을 위에서 꾹 누른다. (누르는 작업은 수시로 하는 게 좋다..)
4. 다 접은 수건은 역시 면이 겹쳐진 부분을 한쪽으로 모으고 그 부분이 수납장 안쪽으로 들어가게 보이게 넣는다. (아무리 1~3번을 잘해봤자, 규칙 없이 마구 집어넣으면 도루묵.)

출처. 코튼랩사 이미지 _ 수건(예쁘게)개기는진짜귀찮아^^



내가 결혼 전까지 옳게 했던 것은 애석하게도 1번뿐이었다. 심지어 대충이라도 접어서 넣고 생활하면 부지런하고 착실한 거 아닌가. 나는 혼자 살 때 건조대에서 말린 수건을 냅다 바로 가져가서 쓰는 날이 더 기억이 진하다. 한심하게 보는 분들이 많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인걸.

정리하는 인간이 되기로 맘은 먹었지만 수건은 약과였고 집안 구석구석 정리요정이 꼬집어주는 방침에 맞춰가는 것은 때때로 이제 막 인간이 된 내게서 분개가 되기도 했다. 어느덧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가 크면서 장난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거실 한편을 장난감 박스가 나란히 줄지어 서있을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육아 전까지 정리생활에 익숙해진 비로소 '인간'이 된 나는 다시 밑바닥을 가는 듯했다. 내 집이 내 집 같지 않았던 신혼집은 지금 생각해 보니 잠깐이었다.

상황이 아이가 있기 전 후는 많이 달랐으므로, 집안 정리나 가사에 내 목소리가 커지자 정리요정이 한동안 잔소리를 포기했다가 오랜만에 입을 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거실에 어질러진 것들을 박스에 치우고, 간단히 청소하는 것만 유지하다가 내 영역의 물품들은 치우는 시간이 아깝고 무엇보다 귀찮아서 근 몇 주간은 (아니 몇 달 정도..) 화장대 옆 한 뼘 남짓한 공간에 책과 공책, 옷, 일부 화장품 박스까지 쌓아놨었다. 보통 남편이 오기 전까지는 급히 치우기도 하는데 한번 마음을 놓으니 방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긴 해야겠고, 이왕이면 잘도 해보고 싶은데, 청소류를 잘하는 것은 이상하게 억울하단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왜일까. 마침, 나도 '치우긴 치워야겠다. 언제 한번 진짜 안 보이는 장롱이랑 옷장 구석까지 싹 다 정리해야지.' 라며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의 일상인 정리, 청소, 설거지, 빨래 돌리기 같은 기본 청소 하는 것도 잘하는 거라고, 그것도 힘들다고, 솔직히 그 이상의 청소에 쓰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그런데 막상 남편한테 저 소리를 들으니 당장 기분은 나빴지만, 그래서 '그럼 쉬는 날 네가 하든가.'라고 하거나 갈등을 무릅쓰고 실제로 어떻게든 같이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해보기로 했다. 마침 옷장 안에 닥치는 대로 넣어둔 옷감과 가방구석 어딘가에, 잃어버린 무선이어폰 케이스(책상 위에 버즈두 개만 덩그러니 있는지 오래됨)와 얼마 전 선물 받은 바람막이(아이 거)가 있을 거라는 걱정 어린 희망이 있었다. 분명히 이걸 밖에서 잃어버린 건 아닌데, 집안 어딘가, 내 옷 주머니 어딘가는 있을 건데, 손 닿는 곳, 눈길이 쉬이 가는 곳에는 도무지 그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선물 받은 바람막이는 택만 떼고 따로 빨아야지 하고 어딘가 뒀는데 어느 순간 없어져서 설마 분리 수거할 때 큰 박스에 나도 모르게 넣어놓고 버려진 건 아닌가 싶었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 정리를 할 때가 된 것뿐이다. 살림을 알차고 가뿐하게 해내는 주부가 되기로 했다.

안 하면 티가 많이 나지만 하면 그냥 원래 그랬던 것 같은 정도의 집안일은 막상 하려면 또 왜 이리 할 게 많은지. 최대한 대충, 일단 해보기로 했다. 나 같은, 근본이 정리 밑바닥 인간은 정리나 청소에 정성과 시간을 들여봤자 효율이나 효과도 없을뿐더러 기만 쭉쭉 빨린다. 실제로 정리를 너무 열심히 했다가는 배가 고파지고, 하기 싫은 걸 잡고 있는 부작용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서 두통약을 처먹어야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대충이 합당하다.

그렇게 나는 옷장에 던져 놓은 옷들을 분리해 개켰고, 마치 언젠간 꼭 쓸 것처럼 구석에 고이 모셔둔 쓰지 않는 옷이나 잡동사니들을 따로 뺐다. 아이 행거 옆에 몇 가지 에코백과 쇼핑백을 걸다 못해 바닥에 쌓아뒀는데, 거기서 이어폰케이스를 발견했다. 지금의 휴대폰을 사면서 남편이 사자고 해서 샀는데, 나는 분명 '아 잃어버릴 것 같은데.'라며 마다했지만, 역시나 그렇듯 사고서는 아주 편리하게 썼던 거였다. 약간 고가의 작은 물품을 끝내는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하는 일말의 자책감이 있었는데, 정리를 하자마자 찾아버려서 짜증 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 옷장도 뒤져서 필요하지 않은 옷과 계절이 끝난 옷을 정리하니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이것들도 청소라고 먼지가 엄청났는지 재채기가 연거푸 났다. 대청소도 아닌데 하찮은 움직임에도 먼지랍시고 나부 대끼는 것들이 가소로웠지만 재채기는 막고 싶었으므로 마스크를 꺼내 쓰고 코지지대를 꽉 눌렀다. 덕분에 재채기가 멈췄고 본의 아니게 세상 대청소를 하는듯한 폼은 덤으로 얻었다.

다음은 현관. 집안 풍수지리 관련영상을 보면 현관을 깨끗이 해두라던데, 정확히 내 화장대 옆에 잡동 산이 쌓일 무렵, 현관에도 온갖 더미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뜯다만 택배상자, 쓰고 접어두지 않은 구루마(정확한 명칭을 몰라 한참 찾아보니 장바구니카트였다.) 같은 것들 말이다. 정말 이러면 내가 봐도 우리 집에 오려는 복들이 들어왔다가 질겁하고 나간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매일 주술적인 마음으로 구질구질하도록 신께 기도하면 무엇하나. 들어온 복이 지저분한 현관을 보자마자 도망간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최대한 좋은 마음을 빌면서 현관과 전실을 치웠다.

방한칸과 현관만 대충 치웠는데도 엄청난 일을 한 것 같았다. 지금은 몰아서 했으니 고단했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거나 조금씩 정리의 결을 높이면 생각보다 괜찮겠다는 긍정상태가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수긍하고 싶진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정리를 해야 될지 모르겠는 다른 방의 옷장과, 안방의 이불장이 남았지만 그건 당장 급한 게 아니니 며칠뒤로 미루고, 화장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하는 김에 두 개 다 하기로 했다 역시 대충. 락스를 쓰지 않아서 어차피 깨끗한 상태가 오래가는 게 아니라 아주 깨끗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좀 더 신경을 써서 안 하던 짓을 해본다. 거실화장실 옆에 세워두었던 매트를 들어 다른 곳에 놓고 청소가 끝나면 여기도 걸레질을 할 요량으로.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세워두었던 그 매트를 치우자마자 그 틈에서 잃어버렸던 새 옷이 나왔다.

정리를 일단 하기만 하면 어딘가에서는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굳이 이렇게 청소를 시작하자마자 나와주다니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슷한 경험이 많은 나로서는 정리를 하기만 하면 언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디선가는 나올 거를 확신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다가 길가에서 버즈통을 떨어뜨리고도 몰랐을 수도, 새 옷을 버린 줄도 모르게 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어폰 보관함만 따로 구입하는 게 가능하지 알아보는 게 날지도 모른다는, 혹은 선물을 준 이에게 어떻게 보여주지도 않고 잘 입히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지 구상을 솔직히 했었다.    

육아라는 큰 임무가 있다는 것은 좋은 변명이 될 수 있지만, 그게 없어도 충분히 내가 정리나 청소를 미루는 특기가 있는 자인만큼 그걸 변명으로 하는 게 납득되는 인간이 아니었다. 세탁을 할 게 있으면 절대 그때 하는 법이 없고, 한번 쓴 물건은 원래 있던 곳에 놓지 않는 습관이 고대로 드러난 셈이다. 글로 쓰면서도, 너무 일상이라 미안하지만 새삼스럽지도 않다.

 최소한 나 자신과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정리요정의 눈에는 이런 습관들이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우리 부부는 솔직히 가사를 딱 반반씩, 그도 아니면 이거는 내가, 저거는 네가 식으로 정해놓지 않았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주말부부 특성상 대부분의 가사를 내가 하고, 내가 혼자 있었다면 절대 하지도 않았을 세부적인 것들(이를테면 에어컨 필터청소, 선풍기 넣거나 꺼내기 등)을 알아서 남편이 찾아서 하는 것들에 만족하기도 하는 나 칭찬해. 아무튼 남편은 그 많은 가사를 반반 같이 안 하는 대신 한때까진 잔소리를 포기한 것 같았다. 심성상 절대 포기한 게 아니란 걸 안다. 참고 참다가 한 얘기란 걸 안단 거다. (다 알겠는데 그걸 왜 잘 놀다 가는 그 작별의 시간에 씨부리고 가는 걸까.)
싫은 소리긴 했지만, 솔직히 맞는 말이기도 했고, 조금은 언짢았어도 결과적으로 대청소에 가까운 정리를 한 건 잘했다 싶었다.

청소를 시작한 첫째 날 오후에 아이와 빨래 개킨 것 중 아이의 양말을 모아 양말서랍에 같이 가져다 놓았다. 양말 서랍에 앉아서 아이가 말했다.
"양말들이 다 짝이 없대."
아빠랑 주말에 양말을 찾아 신다가 아빠가 한 소리를 그대로 한 것이다. 아빠가 그랬단다. 근데 진짜 그랬다. 어쩜 이렇게 신을만한 양말들은 한 짝씩 사라지는 건지. 분명 두 마리씩 있어야 하는 포켓몬들은 다 한 마리씩 밖에 없다. 푸린 한 마리, 이상해 씨 한 마리, 피카츄 한 마리.. 난 분명 열심히 빨래를 모아 세탁기에 넣을 뿐이고, 때로 건조기에 넣었다가 빼서 개킬 분이고, 날이 뜨거운 요즘은 조금 부지런을 떨면 인공건조기 대신 베란다 건조기에 탁탁 털어서 열심히 빨래를 널어놓을 뿐이었는데. 양말은 분명 벗거나 벗기는 족족 착실히 빨래 바구니에 넣었을 뿐인데..  

열심히 청소를 했고, 잃어버렸던 두 가지는 찾았지만 끝내 아이의 잃어버린 양말 짝들은 찾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집에도 이제는 아이의 언어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심지어 이제는 아이가 제법 그 어투를 비슷하게 구사하기에 실소가 터지기도 한다. 잃어버린 양말 한 짝들을 마저 찾는 그날이 오면 진심으로 대견할 것 같다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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