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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n 22. 2023

밤꽃의 계절

친구 유씨의 일화


운전대를 잡고 자동차 시동을 켬과 동시에 양쪽 창문을 내린다. 햇살은 제법 따가우리만치 뜨거워졌지만 에어컨은 최대한 미룬다. 달리면 시끄러울 도합 6차선 이상의 거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창문을 열고 운전을 할 요량이다. 데워진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이 기분 아주 좋아.라고 할 무렵 어디선가 비릿하고 밍밍한 향이 나의 좋아를 방해한다. 하수구나 휘발유의 것처럼 인공적인 '냄새'가 아니라 부드럽고 은은한 걸 봐서는 향이긴 한데 그게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이내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오던 차창도 올렸다. 뭐지?

'아,  설마.'  


이 도로를 가로질러 마주하고 있는 작은 동네 산과 도로에는 가지마다 푸른 잎이 창창하다. 거죽 때기만 남았던 산에는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어김없이 녹음이 푸르다. 더위에 약한 나는 다가오는 이 여름이 좀 두려운 와중에 여름만이 가지는 활기 가득한 녹음만큼은 애정스럽다. 그 사이사이에 멀리서 봐도 꽃가루 색에 가까운 노란 길쭉한 것들이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다. 운전을 마치고 나서 잊을 새라 검색창에 이렇게 쳤다.

'밤꽃 피는 시기'  

희끗희끗 노란것들이 아마도 밤나무 꽃들이리라.


그렇다. 지금은 바야흐로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초여름 6월인 것이다. 새삼스럽게 밤꽃을 언급하고도 웃음에 그치지 않고 타자를 두드리는 이유가 있다. 밤꽃향기 하면 잊을 수 없는 한 친구의 에피소드가 떠올라서다. 이야기를 같이 듣던 나와 친구 둘은 그 이후로 밤꽃 얘기만 나오면 섭섭지 않게 꺼내고 놀리며 웃어제낀다. 올해도 밤꽃향기가 나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글로도 남기는 바이다. ( 주인공 유씨의 허락을 받았다. )


유씨는 어느 날 친한 동기들과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자동차 안에서 신나게 낭만의 제주도로를 달리던 중 차창밖으로 묘한 향이 나더란다. 결코 좋지만은 않은 진한 향에 유씨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고.  

"으.! 읙!! 냄새~~!!"

평소에 후각에 매우 둔감했던 유씨는 뒤늦게 코에 신경세포를 깨워보며 말했다.

"읭? 무슨 냄새?"

자세히 맡아보니 이상한 향이 나긴 났고, 이내 친구들이 이 냄새의 정체가 '밤꽃'향기였음을 말해주었다. 사건의 포인트는 유씨가 밤꽃향이라는 것을 처음 맡아보았다는 것. 밤꽃향기입문을 고백하니 친구들이,

"에에에~! 유씨~ 너 진짜 모르냐~?! 가만히 잘 생각해 봐. 무슨 비슷한 냄새가 있을 건데..?"  


"무슨 냄새지? 음... 뭔가 '익숙'한데.."


( * 아시다시피(?) 밤꽃향은 꽃의 존재 자체로써보다, 대한민국의 많은 성교육 책에 남자의 정액에 관한 설명이 나올 때마다 짝꿍처럼 등장해 주시는 단어가 아닌가. 정액의 냄새는 마치 밤꽃의 향과 비슷하다며. )

"끼약학.. 푸하하,!!!! 역시, 유씨... 대단해~~?! 익숙한이래, 익숙한~~!!!"


'익숙한'이라는 형용사가 이렇게 웃길 수 있는 것인가. 하물며 제3자인 나도 웃는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친구들의 놀림과 동시에 제주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웃음소리가 진동했다는 친구 유씨일화였다.  

나무위키 참조. 알아보니 저 꽃도 수꽃이었네.


 실은 나도 남자 정액의 존재를 성교육 책과 중학교 기술가정 교과서의 설명서로만 보았을 때, 텍스트적 느낌으로 알고만 있었다. 거기서 그렇게 냄새가 날 것 같진 않은데, 냄새가 난다니 그러려니 했고,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실은 오줌 말고 다른 액체가 같은 관에서 나오는 것도 그다지 상상도 안 됐던 것 같다. 사람 몸에서 나오는 눈물, 콧물, 오줌, 똥 무언가의 존재의 냄새가 딱히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남자 사람에게서만 나는 액체의 존재의 냄새는 더더욱이나 상상하기 어려웠을뿐더러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나저나 나도 유씨처럼 밤꽃향을 몰랐다. 밤나무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6월을 35년 차로 맞이하면서 그 향을 맡아보지 않았을 리가 만무한 것 아닌가. 아카시아, 장미, 라일락의 향은 많은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알려주기도, 직접 그 꽃들을 코에 대줘보기도 했지만, 밤꽃은 한 번도 존재를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다. 그냥 추석 때되면 깐 밤이나 먹고, 가끔 빵집에서 밤식빵이나 니얌니얌 먹는 것이 나에게 밤이란 전부였다.  


그러다 본의 아니게(?) 그 향의 존재를 밤의 것보다 사람의 것으로 알게 됐다. 잠자리의 낭만이나 쾌락과 그 향의 존재는 애석하게도 너무 멀었다. 어쩌다 그 냄새를 가까이 맡았다가는 쾌락의 기억도 잠시, 구역질이 나는 것도 상대가 있거나 말거나 감출 수 없었다. 처음 밤꽃향을 인지했을 때를 기억한다. 인간 남자와 잠자리라는 게 꽤나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밤꽃향의 뻔질나는 비유가 텍스트로 스쳐갔는데, 명색이 밤꽃도 꽃인데 인간남자의 정액의 것에 비유되다니 밤꽃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그냥 내 사고가 음흉한 건가.) 밤꽃들에게 미안하지만, 억울하기도 잠시 너무 그 냄새였다.

그제야 나는 '아, 이게 밤꽃향기구나.' 했다.

아마 속으로만.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밤꽃향의 미지가 해소되다니 실소가 터졌지만, 어린 마음에 나 으른 됐네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다 친구들과 밤꽃향기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유씨의 에피소드까지 얻어 들은 것이다. 중학교 시절 밤꽃향기의 비유를 들으며 킥킥대던 남자애들의 의도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 실체를 인간의 것으로 먼저 알아버리고, 그렇게 결혼도 하고 밤꽃향기 가득한 것들을 만나 아이도 낳고, 자주 그 남자의 본가에 간다. 내가 좋아하는 그 남자의 본가는 농지와 낮은 산 근처의 단독주택이라 평화로운데, 집옆에 그 집보다도 큰 밤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요즘 같은 6월엔 주방 앞 창문을 열고 그 밤꽃 향기를 맡으며 설거지를 하는데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잊을래 잊을 수가 없다.  

밤꽃향기의 비유. 이제는 우리 교과서에서 정액 하면 밤꽃향이 짝꿍처럼 등장하던 것처럼 내겐, 밤꽃 하면 유 씨의 '그 얘기'가 자동반사 되었다.


장미의 계절 5월이 지난달이라는 게 소름이 끼치는 와중에 6월에 밤꽃향기를 맡으며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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