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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Jul 10. 2021

엄마의 언니, 나의 이모를 추모하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름에 관하여.

프롤로그.


이십 대 초반의 어리고 열정 많은 나는  철학과 교수님의 교양강의로부터 '죽음'을 새롭게 접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삶과 죽음의 철학’이었다.), 쉽게는 웰다잉이라는 개념과 흡사한 죽음학에서 생경하면서도 충격적이지만 삶의 위안과 지혜를 느꼈다. 그래서 이것을 전공인 가족복지학과 연결시켜 훗날 괜찮은 교육 아이템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더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은 70대 이상의 노인 세대 서나 익숙하고, 그렇다 하여도 나와 별 큰 정이 들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 즉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외면하고도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슬픔의 정서를 공감하는 데도 한계가 컸다. 혹여 슬픔이 있었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열정은 잠시였고, 직업적 소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 어느덧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의 이름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눈을 뜨게 됐다. 아동학대, 치안, 전쟁 같은 일부의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데, 악한 인간과 아쉬운 사회에 대한 분노를, 모르지만 소중했던 타인의 죽음과 연관해서 마음이 간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보이는 건데, 이때까지만 해도 역시, 안타까운 죽음들에 비통함, 분노, 두려움과 같은 마음이 들었다하더라도 실상, 그것은 나와는 터무니없이 먼 것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중 글의 소재를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죽음으로 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5월과 6월을 걸쳐 일어났다.

엄마의 바로 위 언니이자, 일본에 살고 있는 둘째 이모가 얼마 전 그 타지에서 돌아가셨다. 코로나 시국 상 국경을 오가는 것이 어려워서 마주하기조차 힘든 애통함을 장례를 통해 온전히 뱉어 머릴 수도 없었던 것이 영향도 있었겠지만, 충격은 생각보다 커서 외면할 수 있다면 외면하고 싶은데 자꾸만 어떻게든 떠오르는 두려움과 슬픔이었다. 이번 정도의 유의미한 죽음이 솔직하게는 처음이어서 아직도 마음과 눈이 아리다. 그리하여 세 번째로 내가 다루고 싶은 죽음은 나와 가까운 타인의 죽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루고 싶은 죽음은 결국 처음에 열정만으로 접했던 웰다잉이라는 개념과 이어지는 건데, 나의 죽음이다. 그것으로 다시 나는 삶을 이야기할 것이다.




1. 엄마의 언니, 나의 이모를 추모하며.


 작년 겨울 이모가 떠준 나와 신비(아들)의 털 모자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이모는 엄마와 세 살 터울의 언니인데, 10살 차이 나는 첫째 이모보다 말이 잘 통해서 우리들과는 거리도, 통신의 접근성도 멀지만 엄마와 친분이 두터웠다. 4남매 중 홀로 일본으로 시집을 가서 살았고, 일본에서 사는 외국인 중 특히 한국인은 차별과 혐오를 받는 게 있다며 두 딸을 온전히 일본인으로 키웠다.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와 동생, 큰이모네 자식인 사촌 언니, 오빠가 느끼기에도 둘째 이모는 우리 엄마들에 비해 성격이 수더분하고 느긋해 보였다. 성격과 상관없이 타지에서의 결혼과 육아 생활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2000년 하고도 20년이 훌쩍 지난 2021년 그러고도 본인이 돌아가시기 두세 달 전쯤 에서야 스마트폰을 장만하고 카카오톡 아이디도 만든 이모였다. 그전에 둘째 이모의 큰 딸과 먼저 서로의 엄마들에 대한 연락을 주고받던 차에, 이젠 직접 자매가 소통을 할 수 있게 됐다. 그전에 엄마는 카카오톡 영상통화 기능을 잘 쓰지 않았는데, 사용법을 다시 알아 간 후 이모와 눈에 띄게 자주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나도 껴들어서 처음으로 아들과 함께 인사를 드렸었는데, 그게 이모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엄마는 그렇게 한 달 이쪽저쪽의 시간을 이모와 자주 소통하더니,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된다고 그랬다. 큰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 석연찮은 쎄함이 있었던 것도 같다. 사촌오빠를 통해 들은 대략의 소식은 입원이었다. 아마 그때서부터 외면하고 싶은 불길한 느낌이 짙어졌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 난 엄마가 걱정이 돼서 조금이라도 우려스러운 말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만, 우리나라에서도 단순 병원에 입원을 해도 통화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 않은가. 기분이 이상했다. 입원 소식을 듣고도 일주일 정도 지난 뒤였나, 나도 모르게 당시에 둘째 이모의 큰딸과 메시지를 직접 주고받던 사촌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볍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무거운 마음도 아니었다.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이모가 입원해 있다는 곳은 일반병실이 아니라 중환자실이었다.


‘중환자실에 있어도 치료만 되면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


하지만 이모의 병은 예후가 좋지 않고 치료 약도 없는 거랬다. 그제서야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근에 영상통화 중에 이모가 기침을 자주했는데, 그 모습이 영 신경 쓰여서 병원에 가보라고 재촉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개인병원에서 약을 지어다 먹고 있다고는 했는데, 차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연락을 할 당시에만 해도 살이 5kg가 빠졌다고 했다. 엄마는 우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누구보다 일상에서 온 신경을 쓰고 있을 거였다. 코로나 감염을 의심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차라리 코로나가 나은 것이라 할 정도로 치료제가 없는 병이며 이모의 경우 급성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까지도 보인다는 소견을 받은 상태라고 했다.


저녁 8시 무렵 집 옆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정처 없이 돌며 통화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지금 내 옆을 스치는 공기, 여전히 운동장 바퀴를 돌며 시끌벅적하게 운동하는 사람들, 장난감을 번쩍이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모조리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 우려스럽긴 해도 어쨌거나 일상을 누리고 있는 내 모습도 그랬다. 그때 공기의 무심한 결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후로 내내 울적하기보다도 혼란스러웠다. 울적과 혼란을 반복하다가도 어느새 잊고 일상에 집중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놓아 버린 듯했다.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던 운동 챌린지도 그만두었고, 책의 글자는 더더욱 들어오지 않았다. 시국이 좋지 않고, 서로가 국경을 달리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래봤자 얼굴을 보는 것이겠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더 잔혹하고 비참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고, 백신 맞으면 일본에 놀러 갔다 와야겠어.”



이모가 입원하기 전, 한동안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여행을 영 즐기지도 못하고, 않기도 않는 엄마였지만, 이번에는 모처럼 희망을 주어 이야기하길래 새겨듣던 것이었다.

이모가 없는 일본은 엄마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여행이었다. 이런 식으로 희망과 계획이 무산될 줄이야. 슬픔, 애통, 비통, 어떤 단어를 들이대야 좀 어울릴까. 나도 이런데 엄마는 어떨까.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된 엄마와 큰 이모는, 자식들 라인보다도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을 생각보다 초연히 비추기도 했다. 다만 엄마는, 이모가 입원하기 전까지도 자식 걱정만 하다가 떠다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이 걸린다고 했다.


사촌 오빠랑 통화를 한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다. 평소에 전화를 주고받던 건 아니어서, 오빠 이름이 핸드폰에 뜨는데 마음이 미리 덜컥했다. 어제의 오빠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약간 급박하기도 하고 흥분이 섞인 목소리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더 늦기 전에 우리 엄마랑 너희 어머니라도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자.”


나보다 여섯살이 많은 오빠는 우리엄마랑 이모가 처녀때부터 그와 친밀한 기억이 많았기에 더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칼같이 이성적인 오빠는 애써 눈물을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모가 말을 못 할 정도로 의식이 흐릿한 상황이지만, 눈을 깜빡이거나 들을 수는 있다고 전해들은 걸 얘기해주었다.


“알았어 오빠. 여기는 우리가 내일 찍어서 보내줄 테니까. 빠르면 내일, 늦어도 다음날까진 보내주자.”


이어 엄마한테 말을 해야 되는데 여태까진 에둘러서 표현했다면, 이번엔 너무나도 사실을 마주하고 심지어 준비해야 되는 것 같아서 두렵고 착잡했다. 엄마를 생각해서 목소리만큼은 담담하게 하자 마음먹고,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는 그냥 내 전화니까 덤덤하기는커녕 반가움이 섞인 평소라면 내가 좋아하는 밝은 톤이었다. 웬일인지 갑자기 그 톤이 슬프게 느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이건 마치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어릴 때야 감정을 지금만큼 컨트롤이 되지도 않았으니까, 나의 표정, 목소리만 보고도 엄마는 내 기분을 알아챘었다. 정확히 그 기분이었다. 분명 엄마를 생각해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는 게 포인트였는데, 한마디만 듣고도 목소리가 왜 그러냐는 엄마때문에, 정말 초등학생이 울 듯 그러나 울지는 못하고 흐느껴버렸다. 눈물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미안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왜 그러냐며 휴대폰 너머로 같이 울던 엄마에게,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영상을 찍기로 한 상황을 얘기했다. 엄마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다음날 촬영을 했다.


하기 싫은 상상이지만, 마주하기에 자꾸 떠오르는 영상 속 엄마의 언니를 향한 언어는,

언니, 자식들 걱정은 말고 편히 쉬라거나, 고마웠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 상상을 하다가 별안간 바보 같은 희망이 들기도 했다.

‘아니, 실제로 이모는 회복 중인데 우리가 괜히 설레발치면서 이런 슬픈 영상이나 찍고 있는 거 아냐?’ 하는 굵은 희망도 생겼다가 말았다 하기도 했다. 혹여 그 희망이 사실이라 치면 결국 좋은 거니까.

쓸데없는 우려는 그만뒀다.


그나저나 엄마 메시지는 완전히 달랐다.

언니가 아픈데 못 가봐서 미안하다는 얘기, 꼭 나아서 한국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거 많이 보고 여행하자는 얘기였다. 내용은 이랬지만 도저히 웃으면서까지는 할 수 없었고, 몇 번의 시도를 거쳐 겨우 눈물을 멈추고 다시 찍었지만, 눈물만 없을 뿐이지 이미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빨개진 얼굴이 그냥 우는 것보다 더 슬퍼 보였다.


이모는 언니와 동생의 얼굴을 봤을까.

목소리는 들었을까.


영상을 보내고 난 뒤 2주가 되지 않았을 무렵 결국 이모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슬프고, 외면하고 싶고, 두렵다가,

다시 슬펐지만 일단 믿어야 하는 데 믿기지가 않았다.

이 때, 처음으로 장례의식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어디서 어떻게든 장례의식을 함께한다면 같이 슬퍼하고, 눈물을 쏟고, 그렇게라도 하면 오히려 조금은 실감하겠다 싶었다.


기억이 날 만한 가까운 친지 어르신들의 작고 소식은 늘 모두가 자는 새벽, 혹은 늦은 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식은 모두가 일어나기엔 이른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 즘이었다. 전화가 올 시간이 아닌데 울리는 벨소리는 늘 불안했다.

엄마도 소식을 들었겠지만, 그 와중에 엄마의 상태를 우려하며 또다시 확인 전화를 망설였다. 10시쯤 전화해서 들은 엄마 목소리는 잠겼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이모에 관해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목소리를 아꼈다. 엄마는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괜찮아 지려고 노력한다는 담담하고 씩씩한 어조를 내비쳤다.

그 소리에 잠깐이라도 안심한 내가 바보 같다.


글을 쓰는 지금 이모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은 지난 것 같은데, 나의 엄마는 몇 주 전부터 지독한 소화불량과 복통을 종종 호소해서 결국 종합병원에서 위내시경과 각종 검사를 받았다. 위내시경 결과는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깨끗하다시피 했고, 원인은 결국 우울증에 가까운 심경 변화에 따른 신체증상인 거로 판명이 났다.


이모의 병원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종종 기도를 했는데, 오히려 이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하는 것이 더 간절해졌다. 주로 이럴 때만 등장하는 나의 기도, 나의 신이 참 비루하지만, 혹여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이모의 영혼만큼은 부디 평온할 수 있기를. 바랐다.

벌써 10년도 전에 50대의 이모와 엄마. 일본에서.


짧은 덧대는 말.

쓰면서 중간중간 읽어보는데 문득 이 모든 문장이 픽션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초반엔 죽음이란 것으로 화두를 잡으면서 뭔가 대단한거라도 써야 될 것 같았는데, 그건 늘 상상뿐이고, 마음이 흐르는 대로 쓰다보니 그냥 최근의 기억을 정리한 것 뿐이네요. 망설였는데, 무거운 얘기를 몇분에게나마 털어놓게 돼서 역시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프롤로그엔 다양한 모습의 죽음에대해서 써볼 것 처럼했는데, 막상 첫 번째 글을 써놓고 나니 당분간 못쓸 것 같은 생각입니다. 프롤로그까지만 쓰고 올리려다, 글이 길어졌는데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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