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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Sep 20. 2023

새벽 네시의 악몽

아직도 서툰 인생 길목에서



지난주 즘의 일이다.

요 며칠 앞머리가 하루종일 붕 떠있는 것 같고, 힘이 없었다. 주말에 운 좋게 낮잠을 자면 조금 나아졌는데 선잠이었다. 뭐라도 해야겠지만 체력도, 집중력이 받쳐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간 무기력한 듯도 했으나, 누워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건강염려증이 있는 나는 그것 때문에 불안했지만, 내면 자체가 불안하진 않았다. 아이의 지독한 감기가 지나갔고 나도 별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싫어서, 다시 평상시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하룻밤을 꼬박 제때 자고 일어났는데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전했다. 원인을 추려보니, 정확히 증상이 나타나던 그날 밤부터 나는 선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도 그랬다. 분명 일찍 자고 적당히 일어났는데, 눈을 떴을 때는 나는 바로 자기 직전의 잡생각과 실생활 언저리 꿈을 떠돌고 있었다. 잠을 잔 시간은 긴데 잠들기 전에 깨어버린 기분이랄까. 이틀째 노력에도, 기다림에도 차도가 없자 병원에 가봐야겠다 싶었다. 큰 병은 아니겠지, 두려워하며, 온전히 내일을 맞이하는 내가 되겠지 기도하며. 일종에 바보같이.

 "그럴 수 있어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예요. 전혀 걱정 안 해도 돼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실은 선생님을 보자마자 머리가 안 아파졌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스트레스나 불안이 조금 높은 것 같으니 가벼운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서 먹어보기로 했고, 집에 와서 한 톨을 털었다. 플라세보효과인지는 몰라도, 아이를 하원시키며 일상에 돌아오니 몸은 평소대로를 찾은 듯했다. 그렇게 나는 밤에 생기가 돌았고,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으며 책을 좀 읽다가 밤잠에 들었다.

그러나 나는 숨이 막히는 격정에 잠에서 깨버렸다. 이번엔 잠에 들긴 했는데 악몽이었다. 평소 얼토당토않은 악몽과는 거리가 먼 나였는데, 약부작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도 전혀 부작용이 없던 약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나도 쫓았으며, 부서진 기둥과 바닥을 기며 숨으며 쫓길 반복 했다. 주도적으로 점령하는 얼굴과 정체가 안 보이는 누군가는 계속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처치해 나갔는데, 처참하고 잔인했다. 그걸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는 게 비굴해서 더 처참했다. 그리고 무언가 막 잘해야 될 때는 얼어붙어서 그 자리에서 비법을 필기했다. 그러다 또 등신처럼 누군갈 따라서 쫓다가 다시 내가 쫓기고, 다시 잡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세상에. 이젠 내가 물고문을 시켜야 했다. 물은 깨끗했지만 옆에 또 다른 등신들의 침으로 이내 더러워졌다. 가증스러운 안쓰러움도 잠시, 잡힌 사람이 물에 입수되려자 마자 그 사람이 내가 됐다. 물고문을 당하는 나는 크고 깊은 대야 안의 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물에 쳐들어가졌을 때 꿈에서 깼다. 최악의 악몽이었다. 숨이 막히기 직전에 꿈에서 깼으니 다행인 걸까. 이런 악몽은 꿔본 적이 없었다. 악몽을 꾸더라도 대충 보면 일상인물들이 나오며 현실 속에 있을 법한 악몽을 꾸는 게 전부였단 말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였는데, 꿈에서 놀란 마음이 도대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글을 쓰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엄마아빠는 이혼해서 따로 있으니,) 여기가 시댁이라면 시어머니 시아버지 옆에 가서라도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실의 내 옆엔 6살짜리 아이가 자고 있었고, 그나마 내가 지금 안고 잘 수 있는 유일한 성인인 남편은 대구에 있었다. 차라리 아이처럼 울다 깼으면 나았으려나. 눈물 한 방울 나오지도 않고 벌벌 떨면서 그 새벽을 달래야 했다. 혹시 속이 안 좋아서 이렇게 악몽을 꾸고 깬 건가 싶어서 위장 내부를 느껴봤는데, 배가 고팠다. 그렇다고 물을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눈은 졸렸지만, 그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최대한 딴생각 없이 몰입할 수 없는 영상들을 봤다. 댄서들의 영상과, 개그 영상들을 찾아봤다. 그러다 가사가 잘 들리는 가요를 틀어놨고, 잘 때쯤에는 잠들 기용으로 클래식 음악을 눌러놨다. 약 두 시간을 소요했다.

꿈이 빨리 잊히길 바랐다. 아이와 함께 시작하는 아침이 돼서 몸이 깨자, 졸렸지만 머리는 맑았다. 간밤의 꿈을 떠올리며, 나는 지난날 내가 겪었던 불안장애를 떠올렸다. 일종에 그 양상일까를 가늠해 본 것이다. 불안장애가 아니거나 같은 선상의 무엇이더라도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대놓고 '불안'을 날것 그대로로써 최대치를 느꼈다면, 지금 나는 불안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의 불안은 그 정신에 생각해도 정상의 영역이 아니어서 전문병원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지금의 난 몸의 이상반응만 순수하게 불안했을 뿐이다. 나는 괜찮았다. 불안할 게 없었다. 심지어 꿋꿋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잊을만하면, 꼭 내가 아닌 타인들이 나의 위치에 대해서 약간 우려가 섞인 칭찬 아닌 칭찬 혹은 격려, 또는 우려 그 자체를 말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한 명은 서로가 임신했을 때부터 알게 된 친한 언니였다. "해연아 근데, 유진이가 아플 때 너 생각이 났어. 남편이 가까이 있는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너는 진짜 힘든 걸 견디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이 나더라고."
두 번째는 시이모님이었다. 오랜만에 뵀을 때였는데, 부쩍 큰 아이를 보시더니 "해연이 네가 혼자 애먹었다." 하셨다.
세 번째는 엄마였다. 말할까 말까 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왔다는 얘기를 했는데 대뜸 "그게 다 네가 혼자 신비 아픈 거 다-보고, 혼자 다-키우고, 주말부부한다고 혼자 그 애를 써서 그래. 일 때문이라고 해도 동원이는 잘 오지도 않고, 엄마가 다 알지! 그것 때문에 신경 써서 그래 (이하 줄임...)" 했다.
마지막으로 한 친구였다. 강아지 얘기로 짧게 통화하는 중에, 간밤에 꾼 악몽 얘기를 했는데 그 친구도 대뜸 "최근에 신비 계속 아파서 너 신경을 못썼잖아. 그래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나도 힘들다고 생각했던 때는 지나갔고, 남편은 코로나에 걸려서 한주 오지 못했을 뿐이고, 주말부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한건 마음을 접은 지도 한참된 얘기였고. 그래서 나는 힘들다고도, 불안하다고 생각되는 건 '없다'는 요즘이었다. 그런데 이따금씩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 타인이 먼저 이런 얘기를 해줄 때, 정말 그것 때문에 그랬나 하는 뒤늦은 확신이 들었다. 


실레로 나는 아이와 둘이 있을 때는 불안정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자신하곤 했지만, 남편이 온 주말에는 비로소 안온해짐을 느끼곤 했다. 이것은 남편과의 애정과는 무관한 그 사람의 존재자체로써의 의미에 가까운 것이었다. 얼마나 내가 평소에 혼자 꿋꿋하려고 노력하는지, 혹은 그 불안함을 애써 무시하며 지내는지 알게되는 대목이었다. 생각보다 나는 큰일을 꿋꿋하게 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금 잘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그래서 조금은 힘든 게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주기를 바란 큰 마음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뺀 누군가가 먼저 나도 모르는 마음을 알아주는 느낌이 들 땐, 반짝 우쭐해지기도, 위로가 되기도, 굳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가 날 이렇게 알아주는데, 정작 가장 알아야 할 남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 요즘 말하는 티발놈(MBTI에서 T형을 바라보는 아쉬운 F의 언어)이 아닐 수가 없다.


나도 남편도 역마살이 낀 게 분명했다. 그 둘이 만났으니 그 역마살은 배를 더 한 걸까. 결혼에 대한 로망 중에 그놈의 주말커플을 그만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는데, 이루어지는 듯하다가 우리는 물리적으로 다시 멀어졌다. '아이가 있으니 더 붙어야지.'가 이유일 수 있지만, 아이가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결국 그것 때문에 다시 멀어졌다. 나는 '힘들' 었지만, 주말부부를 이유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어떻게든 육아는 할 일이었고, 돈을 버는 것도 할 일이지 않은가. 엄마가 된 이상, 힘든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에너지 낭비였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얼마나 힘들어- 같이 노고를 알아주면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거기서 생각을 넓혀서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하게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하는 데 까지 잘은 해야 했다. 얼마 전에는 아이가 꼬박 2주, 14일을 감기로 앓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혹시 입원가능성이 있을지 몰라 처음으로 혼자서 아예 입원짐을 싸서 병원길을 오갔다. 엄마라면 응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됐지만, 했다. 아이의 첫 입원 때만 빼고, 홀로 입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마치 당연한 듯이 남편은 여전히 대구에 있었다. 서운하거나 아쉽거나 외로울 수도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나는 불안했을 것이고, 불안할 틈도 없이 아이만 보고 앞만 달렸다. 정신줄을 붙들기 바빴다. 그러고 예전보다 좀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담담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담담하진 않아도 조금 무너졌더라도 잘 견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이도 회복하고, 나도 평정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틈을 타 온몸이 지난 불안을 얘기하고 있었다. 불안을 극복하려고 읽은 책에서, 이런 얘기를 읽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무던한 사람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불안도가 높아질 수 있다고. 그거 자체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며, 좀 더 이유를 들자면, 그전에는 회피했던 것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게 육아생활이기에 불안이 더 극대화된다는 얘기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하자면 완전한 회피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갈등도, 싫은 일들도 비교적 잘 피해 갔다. 그런데 육아에서는 모든 것들을 온 육감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전히 단단해지고, 지난한 것들을 마주하는 게 그럴싸해지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얼마나인지 모르기에, 알아도 도리가 없기에 오늘도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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