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적 서정성과 철학적 깊이가 어우러진 종합 예술의 정점 –
2025년 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 <화전가>는 전통과 현대, 서정과 비극, 음악과 언어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작품이었다. 극작가 배삼식의 대본은 구수한 안동 사투리의 리듬감 속에 시적 언어의 미학을 녹여냈다. 그의 문장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마치 오래된 한지 위에 번지는 수묵처럼, 과거의 아픔과 정서가 현재 우리 마음속에 아련히 스며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등으로 남성들이 사라진 가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 직전의 불안한 한국의 현실과 애환은 배삼식 특유의 시적 언어로 표현되며 관객의 가슴을 서서히 조여왔다. 그 안에는 “희생과 기다림으로 역사의 질곡을 버텨낸 이 땅의 어머니들”이라는 주제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한글 아리아의 미학과 대중성의 융합
작곡가 최우정은 이 작품을 ‘Lyric Drama’라고 명명하며 음악과 언어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음악은 바흐의 <커피 칸타타> 바로크 음악이나 한국 가곡, 트로트의 선율적 감수성과 현대적 리듬 등도 과감히 중간중간 매쉬업으로 결합한다. 그 결과, 오페라의 고전적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서에 닿는 아름다운 한국적 창작 오페라가 탄생했다. 오페라 아리아의 선율들은 매우 사랑하면서도 서양식 오페라에 전반적으로 공감이 낮아 그동안 거의 다가가지 않았던 내가, 뮤지컬보다 연극을 더 좋아하던 내가, 이 창작 오페라를 보고 연극에서 느꼈던 큰 감동을 받았다. <화전가>는 심리적 거리감이 있던 오페라의 경계를 허무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공존’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훌륭히 해결해 냈다.
연출의 몸짓 언어와 형상화
연출가 정영두는 전통적 서사에 현대적 몸짓 언어를 불어넣었다. 커피잔을 들고 부채춤을 추는 장면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억압된 시대 속에서도 향과 맛, 예절과 품위를 지켜낸 여성들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재미있게 형상화한 상징이었다. 그 외에도 사라진 남성들, 그리고 민중들의 움직임 등 그의 연출은 대사를 넘어서 몸의 기억으로 역사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해방 80주년과 한국전쟁 75주년을 맞는 현시점에서, 그 당시 여성들의 ‘한과 애환의 기록’이 무대 위에서 높은 미장센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무대와 의상의 조화
무대디자이너 이태섭은 언덕 위 거대한 나무 한 그루와 꽃잎 등을 아름답게 배치하였고 무엇보다도 창호지 문(窓戶)을 가리막이자 한국 전통적인 집의 무대 요소로서 상징적으로 배치하여 기억과 망각, 닫힌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그려냈다.
이에 더해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의 변화 그리고 의상 디자이너 김영진의 전통 한복의 다채로운 색감과 실루엣은 등장인물의 내면과 극적 긴장감을 한 폭의 회화처럼 완성했다.
오페라의 본질, 노래와 연기의 하모니
국립오페라단 단원들의 아리아(Aria), 레치타티보(Recitativo), 앙상블(Ensemble), 합창(Chorus) 연주력과 대사 연기 모두 탁월했다. 맛깔난 안동 사투리의 자연스러운 발성과, 감정의 극점에서 터져 나오는 카덴차(Cadenza)는 단순한 기교를 넘어, 애환이 닮긴 삶의 언어가 감동적인 음악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송안훈 지휘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창작 오페라 <화전가>는 관객을 시종일관 울렸다 웃겼다 했고 곳곳에서 흘린 눈물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역사를 되돌아보는 공동체의 기억과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일깨우는 울림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가족의 서사로 끌어안으며, 그 슬픔을 노래로 승화시킨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진 수준 높은 종합 예술로서의 오페라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전통과 현대, 지역성과 보편성을 아우르는 이 작품을 통해, 국립오페라단은 ‘한국 창작 오페라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K-오페라라고 굳이 하지 않더라도 향후 이들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