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0만원도 안 되는 내 위시리스트
유달리 피곤한 한 주 였다. 평소에 잔병은 없지만 한 번 아프면 좀 쎄게 겪는 편이라 지난 주말부터 목이 붓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며칠 째 골골대고 있었다. 평소에는 가급적 낮잠을 자지 않고 차라리 일찍 자려고 하는 편인데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는데 눈에 들어온 입금 알림.
입금자명에는 '짜장면 맛나네~^^' 라고 써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카톡을 확인하니 역시나 엄마였다.
짜장면 먹다 딸래미 생각나서 100만 쏜다^^
오잉... 최근에 남편과 휴가 갔을 때도 이미 휴가 용돈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용돈이라니...
엄마가 부자이신 건 아니지만 자녀들에게만큼은 넉넉하게 쓰시는 분이라 매번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한 때는 이게 다 빚인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과하게 무겁기도 했지만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부분에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다만 이 번에는 이어서 하신 말씀에 좀 속상해졌다.
살아있을 때 써야지^^
평소같았으면 그저 장난으로 넘겼겠지만 이번에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엄마가 최근 건강검진에서 당화혈색소 수치가 높게 나와 당뇨가 의심되시는 상태이시기 때문이다. 당뇨 확진은 아니지만 이미 확진받을거라 짐작하시는 엄마는 말은 덤덤하게 하셨지만 꽤 속상하신 듯 했다. 이미 이모와 아빠는 당뇨약을 드신지 꽤 되었기 때문에 당뇨증상과 당뇨관리로 인한 고단함을 충분히 간접경험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께 전화를 드려서 원래 당뇨관리가 건강관리나 마찬가지니까 더 건강히 오래오래 사시기 위한 노력하신다고 생각하자고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든 생각이 '엄마 근데.. 당뇨 수치 때문에 속상하다고 하시면서 짜장면을 드셨네..?ㅋㅋㅋ'
갑자기 받은 이 용돈을 어떻게 쓸까 생각해봤다. 올 해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돈 절약과 저축을 시작했다. 그래서 소비에 있어서 기본 모드가 '안 사도 안 죽어' 였다. 뭔가 자연스럽게 사야될 것, 사고픈 것이 떠오르면 '꼭 사야 되나? 안 사면 안되나?'를 생각하면서 가급적 사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이 그닥 고달프거나 서럽진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쪽에 가까웠다. 꼭 비싼 물건만이 사치가 아니었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자주 사는 것도 어떤 기준에선 사치였다. 그걸 안해도 삶에 큰 이상이나 불편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경험해보는게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용돈도 당연히 저축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예비비에 넣어둘까 저축통장에 넣을까를 고민하며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그 돈은 그냥 자기가 써요. 그렇게 받은 돈은 써야 되는 거야.
두 번째 오잉... 같이 돈 모으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허락하니 또 마음이 동했다. 그럼 다는 아니어도 좀 써볼까..? 마음을 돌리니 놀랍게도 그간 잘 넘겼다고 생각했던 나의 위시리스트 아이템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필요한 것들 위주로 생각이 났다. 마침 오늘 떨어뜨려서 망가진 내 카드수납 폰케이스와 그립톡은 당장 필요하니까 사고... 화장품도 정말 쓰려고 사는거니 사고... 그렇게 시작한 장바구니 목록은 어느 새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갖고 싶은 것'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총 8개의 아이템을 질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정도면 최근 갖고 싶었던 것들까지 얼추 다 넣었는데도 10만원이 넘지 않았다. 정말 쿠팡 만세! 이자 돈 안 드는 나 만세!였다. 약간 한편으로 무서울 정도로 소비의 쾌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쿠팡의 고마움으로 다음 날에 바로 물건들을 받기 시작했다. 필요했던 물건들도 반가웠지만 역시 정말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든 건 '꼭 필요하진 않지만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었다.
한 권을 완독하는 스타일에서 여러 권을 병렬독서하는 스타일로 바뀌면서 은근히 난감할 때는 읽은 부분을 표시할 책갈피가 없다는 거였다. 새책에 붙어 있는 띠로 하거나 포스트잇, 주위에 보이는 종이조각들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어디 가버렸을 때는 급하게 책날개로 표시하다 남편에게 책 망가진다고 한소리 듣기도 했다. 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책갈피를 선물해놓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누가 선물 안해주나.. 싶기도 했다(이건 너무 처량한데..?). 그래도 오기로 사지 않돈 책갈피를 드디어 질렀다. 120장에 만원도 안하는데 너무도 예쁜 책갈피들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는 풍경들로 책갈피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아이들이 집어가서 쓰고는 뚜껑을 닫아놓지 않아 자꾸 말라버렸던 형광펜들도 아예 세트로 사버렸다. 여기저기 대충 모아놓던 펜홀더도 봄처럼 귀여운 아크릴 꽃모양으로 사보았다. 이렇게 모아 놓고 찍으니 정말 부자가 된 듯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괜히 필사모임 채팅방에다 자랑하기도 했다. 유치한 자랑에도 다들 예쁘다며 잘 받아주셔서 또 행복해졌다. 일부러 엄마에게도 보냈다. 사실 남편의 말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내가 과감히 위시리스트들을 사버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 나 엄마가 준 돈으로 이렇게 더 행복해졌어요!
말로 하진 않아도 엄마가 원하는건 사실 그거였을테니까. 딸이 어디 아프진 않을까, 마음이 힘들진 않을까, 아무 일 없어도 문득문득 걱정하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그래서 내 돈으로도 살 수 있었던 것을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샀다. 이 물건들이 주는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겠지만, 엄마가 문득 짜장면 먹다 나를 떠올리며 나도 행복하길 바라고 주신 이 용돈에 담긴 마음은 아주 오래오래 내 행복을 보장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