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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신 Apr 27. 2023

어리광이 나간 자리에 용기가 들어왔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이유

"그 고생길을 왜 가냐?"라고 나한테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남편이 유일하다.

"재미있잖아!"

그는 내 대답을 들으며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울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

내게 산티아고 가는 이유를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왜 산티아고 길을 가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될 것 같아 두 번째 비행기가 출발한 게이트 앞에 앉아 다시 한번 생각해 다.


산티아고 순례길, 35일간 먹고 자고 걷는 단순한 생활 흥미로웠다. 내가 제대로 비울 수 있다면 제대로 얻는 것도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순례길을 걸으며  내가 심플한 인생에 필이 확 꽂혀 남은 시간을 심플한 정신으로 살게 되면 좋고,

이사 때마다 끼고 다니던

추억 어린 잡동사니도 혹시 마음 비우듯   버리게 되면 더 좋고. 내 혈관 속 붙어있는  콜레스테롤도 비워지면 더 더 좋을 것 같았다.


결혼 생활 40년.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아래

도전 정신도, 야성도 퇴화되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도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만')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늘 어리광은 반쯤 깔고 나 편할 생각만 한 것이다.


특히 외국 여행. 외항사 스태프로 일하는 둘째 적극적인 효도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호사스러운 자유여행을 누렸다.

그러나 옆에서 보기에 둘째는 부모 여행계획 짜는 것을 점점 힘들어하고 나는 어느새 민폐 부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부모가 돼 갖고 이건 아니지!

변해야지!!

이 모든 이유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여성에게 가장 안전하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내게 다가왔다.

내 체력과 정신력을 좀 아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남들이 뭐라고 격려해도 믿지 말아라.  다 무책임한 말이다. 당신 체력으로는  산티아고 무리이다"라고 말했다.

ㅠㅠ


그래도  나는 내 뜻을 포기하지 않고 산티아고 가는 분들의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다. 내게 크게  도움이 됐지만 그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여행의 불안은 희망과 같이 간다"라고 또 한 지인이 말했다.


특히나  모두 한 목소리로 "산티아고를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라고 권했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티아고  계획을 세운 것을 아는 한 지인이 " 나도 따라가겠다"라고 했다.

내가 망설이며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 그 지인이 덜컥 환불불가 비행기 표를 끊어 버렸다.


목표를 세웠지만 막상 계획은 부실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출발 날이 다가왔고 생일을 맞은 둘째와 파리에서 일주일가까이 보내고 지인이 합류하고  둘째는 직장 일로 떠났다.


그리고 파리에서 4월 28일 출발하는 지인의 환불불가 파리출발 비아렛츠행 비행기 타는 날을 기다리는 사이 갑자기 내가 표를 구매한 항공사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버부킹으로 구매한 스텝 비행기 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 순간 불안한 마음에 내 머릿속이 하얘지며 " 여행계획이 틀어지면  직항 타고 서울 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  단 한 가지 단순한 (?) 결론밖엔 없었다. 불안이 나를 잠식했다.

그러나 동행이 있는 마당에 어떻게 세상 일을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있으랴?


정신을 수습하여 다시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11만 원 하던 파리-비아리츠행  90분 걸리는 직항표는 80만 원, 100만 원으로 올라 있었다.

그나마 매진.

고속기차도 완전 매진.


하루가 지나고 오늘 새벽,

그래도 공항에 하루 먼저 나와 기다리면  무슨 수가 있을까 하여 예정보다 하루 앞서 새벽부터  공항에 와서 비행기 노쇼가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  9시 15분 떠난 비행기는 오버부킹으로  나처럼 기다리던 여덟 명 스탭 중  세명을 데리고 떠났다. 두 번째 12시 35분 비행기는 나를 포함해  기다리던 스탭티켓 세명중 두 명은 자기 회사 직원이라며  둘만 데리고 떠났다.

다음 비행기는 7시간 후인 밤 8시 45분.

불편해도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세대답게 기다려봐야지.

시간이 여유로운 오늘따라 면세점 명품도 눈에 안 들어온다. 공항의 분주함, 라운지 음식도 번거로워  문닫힌 조용한 게이트 앞에 앉아 있다.

오늘 하루종일  이렇게 공항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내일은  꼭 갈 수 있다.

왜냐면 나도 아깝지만 천정부지로 오른  80만 원짜리 비행기 표를 사놨으니까.


그래도 메시지 받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과정을 칭얼대지 않고   오늘 파리 드골공항 나가 온종일 허탕 치는 한이 있더라도 담담히 맞선 내가 조금은 대견하다.

어리광이 나간 자리에 용기가 들어왔나 보다.

여기에서 더 노력하면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서 좀 더 노력해야 된다는 뜻은 내가 좀 더 많이 많이 고생을 해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부엔 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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