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다시
잘 지내다가도 한 번씩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오늘 정말 보람찬 하루였어. 허툰 시간 없이 하루를 꽉 채운 기분이야'라는 생각이 든 날의 바로 다음 날이 대게 그렇다. 환영할 길 없는 이러한 불청객은 약속도 없이 뜨문뜨문 나타나서는 금방 떠나는 법도 없다. 전날 미리 세워 놓았던 하루 계획을 모조리 엉망으로 만든 후에야 비릿한 미소와 함께 사라진다.
하루를 완벽하게 보낼수록 다음날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단순한 의지 부족일까. 아님 마음속 청개구리 때문인 걸까. 의지나 마음 탓으로 돌리기에는 성실했던 전 날의 나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완벽하다 생각했던 하루가 사실은 완벽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내가 완벽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던 하루가 사실은 나를 혹사한 하루는 아니었을까. 사람은 모두 힘듦의 역치가 다르다. 누구는 60만큼만 힘들어도 앓는 소리를 내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90까지도 거뜬히 버텨낼 수 있다. 개인마다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는 있지만, 정작 자신을 객관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실제보다 높게 산정하여 무리하다가 방전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근래 등산 중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평소 빠른 페이스로 산을 오른다. 다른 사람을 추월할 때에 괜스레 찾아오는 옅은 뿌듯함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렇게 산을 오르던 중 정상까지 3km가량 남은 지점에서 한 남자를 앞질렀다.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진한 파란색 상하의가 기억에 남았다. 그 후에도 여러 사람들을 지나치며 산을 올랐다. 그러던 중 정상 1.6km 지점부터 경사가 급격히 가파르게 변했고, 계속해서 빠른 속도를 유지한 탓에 숨이 차 호흡을 고르기 위에 멈추어 서는 빈도가 잦아졌다. 그렇게 정상까지 1km, 30분 정도만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쉼터 벤치에 앉아 마실 물을 꺼내려는 순간, 진한 파란색 상하의를 입은 남자가 내 눈앞을 지나쳐갔다. 느리지만 꾸준히, 일정한 페이스로 쉬지 않고 올라온 그에게 따라 잡힌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잠시 멍하니 그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그를 앞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한 번 가빠진 호흡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고 남은 1km를 오르는 동안 2번을 더 쉬어 가야 했다. 결국 나는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보다 먼저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진한 파란색의 남자를 마주해야만 했다.
지나친 목표 설정 또는 조급한 마음은 강한 동기부여로 작용하여 단기간에 높은 성과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과부하로 이어져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그렇게 축적된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루하루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로 멋대로 지정해 버린다.
이때 자기혐오나 자책 등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번아웃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해왔는 뜻이다. 일종의 훈장이라 여기고 되려 스스로를 기특하다 칭찬해주어야 한다.
심신의 피로는 단순히 마음 가짐을 새로이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가빠진 숨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무기력에서의 회복 또한 물리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면, 의욕이 생길 때까지 그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다소 회복이 더디다고 느껴지더라도 초조함은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급한 마음에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일어난다면 금방 다시 주저앉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호흡이 돌아오고 의욕이 붙으면 그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계속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루 10km를 걷고 다음날 몸져눕는 것보다, 무리하지 않고 매일 6km를 걸을 수 있다면 더 멀리 갈 수 있다. 천천히 갈수록 더 빨리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