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큰고모부의 역전 이발소
큰 고모부는 이발사였다. 고모부가 운영하던 이발소 이름은 <역전 이발소>였다. 기차역 광장에 상가들이 밀집해있는 곳에서 자그마한 이발소를 운영했다. 왜 기차역 광장에 있었는지 모른다. 기차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단정히 하려는 사람들을 공략한 것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목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자전거를 배웠다. 당시에는 어린이 자전거가 귀하던 시절인지라, 엄마 아빠가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배웠다. 자전거를 끌고 일단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내 짝꿍 친구가 내가 탄 자전거 안장을 잡아주고 균형 잡는 것을 도와줬다. 하루 만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자전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당시 내가 살던 동네의 기차역 광장으로 가서 자전거를 탔다. 그곳은 넓기도 하거니와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서 자전거 타기 편했다. 넘어지면 곧바로 무릎에 생채기가 났지만, 널따란 그 광장이 참 좋았다. 때는 1986년. 차도 많지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를 타고난 뒤에는 고모부의 ‘역전 이발소’에 들렸다. 이발소에 들어가면 쉐이빙 크림 냄새가 몽실몽실 떠다녔다. 고모부는 흰 가운을 입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며 이발을 했다. 때론 솔로 열심히 쉐이빙 크림을 저어가며 거품을 만들고, 크림을 솜씨 좋은 화가처럼 손님의 하관에 척척 발랐다.
큰 고모부는 7남매 집안에 맏사위로 장가를 들었다. 위로 처남 세명. 밑으로 처남 둘. 그리고 처제 하나. 그리고 호랑이 같은 장모님이 계셨다. 고모부는 명절날에도 매번 빠지지 않고 처갓집에 꼭 왔다. 명절 당일은 본가에 가고, 그다음 날이면 반드시 왔다. 그것은 작은 고모부 역시 마찬가지. 명절 외에도 생일이나 기념일에도 큰 고모부와 작은 고모부는 빠진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고모가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고모부 혼자 명절 쇠러 온 적도 있었다.
명절날, 기가 센 처남들 사이에서 사람 좋은 미소로 ‘허허’ 웃던 큰 고모부의 수더분한 모습. 목소리 큰 처남들과 장모님이 각자 한 마디씩 말을 던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에도 (하다못해 텔레비전 속의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서 한 마디씩 할 때도) 고모부는 그저 조용한 미소를 띠며 듣고만 계셨다. 그 집은 듣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집이었다. 다들 자기 이야기만 하려 했다.
가끔 고집 센 처남들끼리 언성을 높이고, 얼굴이라도 붉힐라치면 고모부는 중간에 나서서 별일 아니라는 듯, 기분 좋게 중재하시곤 했다. 본래 과묵하시기도 하셨지만, 고모부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아셨던 것 같다. 처갓집 식구들과 아무리 사이가 좋고 허물이 없어도 그곳은 어디까지나 처갓집이었다. 큰 아빠들은 툭하면 ‘김 씨 집안’ 운운하면서(큰 고모부는 김 씨였다) 큰 고모부와 거리를 두었으니까. 사위는 사위였다.
하지만 <역전 이발소>에서 만큼은 고모부가 왕이었다. 흰 가운을 입고, 가위로 머리칼을 싹둑싹둑 자르거나 이발기로 쓱쓱 시원하게 밀어내는 고모부의 모습은 집에서 보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고모부 말을 들어야 했다. 제 아무리 목소리, 10살 위의 큰 처남이 온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이발소에 가면 고모부는 반가운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애들아, 소파에 앉아서 좀 놀아라’라고 하시면서 요구르트를 주었다. 그곳엔 황토색 소파가 있었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앉았는지, 반들반들하다 못해 앉으면 푹 꺼져버리는 소파였다. 앉는 순간 잠시 갸우뚱했다. 팔걸이 부분은 반들반들 윤이 났고, 엉덩이가 닿는 부분은 군데군데 찢어져있어서 안에 있는 솜들이 미어 나오기도 했다. 요구르트를 쪽쪽 빨며 이발소 그림이라는 것도 나는 그때 그 가게에서 보았다. 호랑이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과 그 옆에 무슨 한자가 쓰여 있었던 것 같다. 이발소와 호랑이는 무슨 관계일까? 호랑이처럼 멋있게 머리를 해주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큰 고모부가 특별히 호랑이를 좋아하시나... 그때 고모부한테 한번 물어볼 걸. 못 불어본 게 조금 아쉽다. (그나저나, 왜 이발소에는 가끔 격에 맞지 않는 그림들이 걸려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혹시 옛날 이발소는 갤러리를 겸한 고급문화를 향유하던 공간이었을까?)
난로 위에 있는 양은 통 속에는 뜨근하게 익어가는(?) 타월이 있다. 김이 폴폴 나는 타올로 손님의 얼굴을 마사지한 뒤, 고모부는 온 집중을 다해서 면도를 했다. 나는 숨죽여서 그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럴 때면 면도칼이 지나는 ‘사악 사악’ 소리가 이발소를 가득 채웠다. ASMR의 시초랄까.
손님들이 돌아간 뒤, 숨을 돌리게 되면 고모부는 우리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학교는 잘 다니는지, 엄마 아빠는 잘 계시는지 등을 물었다. 그리고 꼭 100원을 주셨다. 당시에는 핫도그가 50원이었기 때문에 100원은 아주 큰돈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역전 이발소를 좋아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100원이라는 용돈 자체도 물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또 다른 뭔가가 있었다. 일종의 이벤트 같은 기분이었다. 고모부도 뻔히 알았을 것이다. 나이 어린 조카들이 굳이 이발소에 놀러 오는 이유를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쥐어주는 100원은 잊으면 안 되는 ‘화룡점정’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고모부도 이제 연로하셨다. <역전 이발소>는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고모부의 막내아들이 이제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시간도 정말 빠르다. 여자인 나로서는 별로 갈 일이 많지 않았던 이발소. 그 이발소에 나는 이렇듯 애틋한 추억이 있다. 특히 요즘은 이발소도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다. 젊은 남자들도 헤어숍에서 머리를 한다. 지금도 길을 가다, 빨간 파란 줄 원통이 돌아가는 이발소를 보면 고모부 생각이 난다. 흰 가운을 입으면 무한 카리스마가 넘치던 고모부. 한 남자의 젊은 시절이 고여있었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