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시계태엽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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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당당히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한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영화관 가는 것을 좋아했다. 영화관에서 본 첫 영화는 7살 때 보았던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이다. 이후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거쳐 간 여러 히어로 영화들, 해리포터의 마지막 편을 보러 처음 혼자 영화관에 갔던 날, <인터스텔라>를 감탄하면서 봤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청소년기 영화관에 대한 추억들 사이에는 영화를 관람하며 공유했던 들뜬 감정과 관람 후 영화에 대해 떠들던 이야기가 아련한 파편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이때쯤부터 영화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영화 제작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떤 동기로 이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도 하며 영화에 대한 경험을 쌓아갔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이전까지는 박스오피스 순위권에 있는 상업 영화만 보았다면, 웨스 앤더슨이나 박찬욱과 같은 감독의 작품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3학년, 한참 바빴을 시기지만 역설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꽤 많은 영화를 챙겨보곤 했다. ‘나의 유년기를 지켜본 영화들’ 이라는 주제를 영화광이 된 지금의 나를 만들게 한 영화들이라고 해석한다면 바로 떠오르는 두 작품도 이 시기에 본 영화들이다.
첫 작품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이다. 와킨 피닉스와 에이미 아담스가 주연으로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다는 파격적인 주제를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실 분홍색 포스터가 예뻐서 보게 되었는데, 그 당시까지 보았던 어떤 영화도 이 영화만큼 나에게 충격을 준 작품은 없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직접 써주는 대필 작가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별거하며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가지는 인공지능 사만다를 만나 그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이해해 주는 그녀 덕분에 행복을 찾고,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사만다는 셔츠 포켓에 넣을 수 있는 크기의 디바이스 안에 존재한다. 영화 초반에 모든 일에 심드렁하던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함께 여행하며 얼굴에 행복이 보이는 과정이 너무 따뜻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색감이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대비나 채도 높은 색의 활용으로 전반적으로 조화로운 색감을 보여준다. 이런 시각적 즐거움을 영화에서 처음 경험했던 터라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이 작품은 분명 지금까지 봤던 영화와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고, 감상하고 며칠 동안이나 여운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형용하기 힘들지만, 나에겐 마음속 어딘가 존재하던 깊은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준 귀한 작품이다.
또 다른 충격을 준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이다. 고등학생이 보기엔 다소 잔인하고 충격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으나, 영화 예술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큐브릭 감독을 알고 있던 친구에게 우연히 책을 추천 받아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고, <시계태엽 오렌지>의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감상하게 되었다. 지금도 좋아하는 감독을 물으면 스탠리 큐브릭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좋아해서 그의 모든 작품을 다 감상했지만, 고등학교 때 본 <시계태엽 오렌지>는 파편적인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뿐 아직도 후반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해 잘 몰랐던 내가 보아도 모든 장면을 정말 완벽하게 연출했다는 감탄의 감정은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색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매력적이었다. 또한 다소 실험적이었던 내용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 뇌를 강타했었다. 영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 해석을 찾아보기도 하고, 스스로도 영화를 곱씹어보며 의미를 고민해보곤 했다. <그녀>를 보고 영화를 통해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이런 내용을 다룬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 영화에 대한 나의 시각을 넓혀주었다. 제대로 된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작품을 다시 찾아보지 않은 것도 그 때의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살 즈음 영화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하며 영화만큼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대학교 입학때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은 그림 혹은 디자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디자인과에 들어오고 난 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 당시 나의 기록을 살펴보면 혼란스러운 감정이 잘 드러난다. <카포의 트래블링>에서 세르주 다네가 언급한 “유년 시절을 지켜보았던 영화들” 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마 현재 영화를 보는 나를 형성하기 전, 순수한 즐거움 때문에 영화를 보던 내가 인상깊게 본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났다는 점에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을 고르는 것이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을 되돌아보며 지금의 나를 형성한 시작점을 찾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들이 크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가족들과 집에서 모여 앉아 <웰컴투 동막골>, <전우치>를 보며 웃던 기억, 혹은 영화관에서 <라스트 갓파더>, <전국 노래자랑>을 보고 아주 실망했던 기억 정도. 하지만 이 영화들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그 정도로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는 작품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기에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준 나의 두 영화에 더욱 고마운 마음이 크다. 세상을 스크린에 사실적으로 옮겨 놓은 것을 좋아하는 내 영화 취향은 어쩌면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인물을 통해 새로운 감정은 느끼며 또 다른 나를 알게 되는 것. 어떤 영화를 보든 느끼는 설레는 감정은 이번엔 어떤 것을 깨닫게 될지에 관한 물음표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처음 느꼈던 그 감정을 앞으로도 계속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