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련님, 황달식 -6-
걷잡을 수 없는 파도
동서의 지갑이 없어졌다.
도련님이 결혼 1주년 선물로 준 지갑이었다. 유명 브랜드로 항상 재고가 없어 구하기 힘든 지갑으로 한정판 제품이었다. 에비뉴엘 명품관과 신세계 본점과 갤러리아 압구정을 차례로 들리며 겨우 재고를 확보하여 선물한 것으로 두 사람에게 지갑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도련님이 그 백화점들을 직접 다니진 않았다. 개고생은 동생들이 했다. 도련님은 생색만 내었다. 어쨌든 동서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받았고 외출할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지갑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 동서는 집 앞 카페며 식당, 옷가게 등을 들러 혹시 습득한 물건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귀중한 물건이라 누군가 주웠으면 슬쩍 가졌을 가능성도 컸다.
낙담한 동서가 집에 와서 물을 한 잔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였다.
동서가 산 적 없는 아기자기한 캐릭터 주스가 들어있었다.
조카가 항상 사달라고 졸랐으나 몸에 좋지 않은 성분이 들어 있어서 좀 더 크면 사주겠노라고 한 주스였다.
당장 조카를 불러 닦달했다. 좀 더 영리해진 조카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뺀질거렸다. 도련님이 회초리를 손에 쥐고 방바닥을 두세 차례 때린 후, 다음은 널 때리겠노라고 으름장 놓은 후에야 사실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역시 폭력 앞엔 장사가 없었다.
그동안 물건을 훔칠 때마다 동서가 제발 돈을 주고 사라고 해서 돈이란 것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고 했다. 동서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을 보았고, 자기도 주스가 먹고 싶어서 돈을 꺼냈다, 했다. 그럼 남은 돈은?
주스를 샀으니 남은 돈은 필요 없어져서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다 나눠주었다고 했다.
그날은 도련님이 동서에게 생활비를 준 날이었다. 동서는 납부할 각종 고지서등을 처리할 목적으로 지갑에 많은 돈을 넣어두었다.
도련님은 눈 앞이 아찔해졌다. 자신이 어렸을 때처럼 한심한 짓을 일삼는, 자신을 꼭 닮은 조카에게 빡이 쳤다.
"관리비 같은 건 자동이체로 내란 말야!!"
자신은 은행에 돈을 맡겨본 적도 없는 도련님이 애꿎은 동서에게 화를 냈다. 사실 조카에게 화가 났지만 조카에겐 제대로 화를 내지 못했다. 착하고 순한 동서는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럼 지갑은? 같은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서 선물로 줬다고 했다. 원래 은비는 현빈이랑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은비가 받더니 이제 내가 좋대! 조카는 속도 없이 좋은지 헤헤 웃었다.
물량공세로 여자의 마음을 산 것은 어찌보면 조카도 힘들게 결정한 일이었겠지만, 지금 하나뿐인 아들의 연애사를 챙겨줄 때가 아니었다.
도련님은 당장 어린이집에 연락해서 현금과 지갑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많은 현금을 가지고 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부모들이 있었고, 어린이집에서도 현금의 출처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현금은 무사히 수거되어 동서에게 전달되었다.
문제는 지갑이었다. 한정판이라 똑같은 지갑을 다시 구할수도 없었다. 은비 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지갑을 돌려달라 했지만 은비 부모님은 그런 물건을 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어린이집 가방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했다.
도련님은 또 빡이 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어디서 개구라야! 자기들이 먹으려고 못본척 하는거 아냐? 거지같은 개새끼들! 길길이 날뛰는 도련님을 대신해서 동서가 다시 은비 부모님께 연락을 시도했다.
죄송하지만 샤넬 한정판 지갑이예요. 지금 구할수도 없는 모델이라 꼭 찾아야 합니다.
샤넬의 힘은 대단했다. 즉시 은비 부모님이 은비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물어내라고 할 까봐 다소 겁도 났을 것이다.
취조 결과 은비는 이미 그 지갑을 하나뿐인 단짝 서아에게 선물한 뒤였다.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다시 서아네 집에 연락했다. 서아는 지갑을 받았으나 그 후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린이집 가방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서아 부모님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알아낸 사실은 하윤이가 갖고 싶어해서 잠시 빌려줬다는 대답이었다.
이러다가 어린이집 전원에게 연락할 판이었다.
하윤이는 울룩불룩한 지갑의 엠보싱을 뾰족한 것으로 찔러 터뜨리고 싶어서 달라고 한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듣는 동서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어린이집에 뾰족한 물건이 없어서 터뜨릴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는 훌륭한 어린이집이었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동서였다. 단체로 어른을 들었다 놨다 하는 수업이라도 듣는 모양이었다.
결국 지갑은 지안이라는 친구에게로 가 있었다. 하윤이가 지안이에게 주었다 했다. 지안이는 샤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평소 그 엑스자 모양이 달려있는 지갑을 갖고 싶어했다, 한다. 엄마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엄마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다.
아주 기특한 생각이었다. 누구 아들내미는 엄마 지갑을 훔쳐 여자친구도 아닌 썸녀에게 선물로 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은비에게서 서아로, 서아에게서 하윤이로, 하윤이에게서 지안이로 지갑은 이동해 있었다.
도련님과 동서는 지칠대로 지쳤다. 겨우겨우 지안이의 부모님에게 수소문해서 지갑의 행적을 물었다. 다행히 배운 사람들이라 지갑을 찾아내 사과와 함께 즉시 돌려주었다.
남은건 조카에게 행동의 댓가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도련님은 조카를 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좀더 비뚤어진 이유가 혹시 부모님께 하도 처 맞아서가 아닐까 싶었다. 때리는 대신에 정신적 충격을 줘서 도덕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길 빌었다.
도련님은 조카가 부디 반성하길 바라며 조카가 제일 아끼는 무선자동차를 조카의 눈 앞에서 부쉈다. 조카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우는 법도 잊었다.
"이건 너가 엄마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간 대가야. 다음에도 또 그런 짓을 하면 그땐 무선자동차로 끝나진 않을거야."
정신교육부터 금전교육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도련님이 틀렸다.
-6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