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두려움과 시작의 용기
'출발하면 반년은 넘길 순 있을까?
준비하면서 이 생각을 수백 번 한 것 같다. 갖고 있던 통장 잔고를 바라볼 때마다 앞으로 벌어질 나의 모습이 뻔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꿈으로는 전 세계 미슐랭 가이드 식당만 골라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당장 현실 속 배고픈 사람은 주린 배부터 채워야 한다.
자전거를 사고 나서 근거 없는 행복감이 기세 좋게 차올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현실이 날린 귀싸대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산도 문제였지만 루트에 대한 세부 계획 또한 염려되는 부분이었다. 처음 해 보는 여행이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날씨나 도로 상태, 내 건강과 자전거에 따른 변수가 많은 여행이라 계획을 세운들 계획대로 될 리가 없기에 감을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예산으로 얼마나 여행할 수 있을까?'
'힘들다고 언제 포기하고 돌아오게 될까?'
'주변 사람들한테 쪽팔리고 싶지 않아서 너무 힘들다고 밑밥 깔아놓고 여행 중간에 슬쩍 들어올 것 같은데...'
'혹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난다던가, 교통사고 나서 비명횡사하지는 않을까?'
'꿈이란 말로 현실 도피하려는 거야?'
'그럴 거면 한국에 있지 뭐 하려고 떠나는 거야!?!'
집안 사정이 여행 중에 나아지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여행 상황을 그나마 낫게 해 줄 거라는 일말의 희망사항이었다. 별 의미도 없고 가망도 없었지만 뭐라도 믿고 싶었으니까. 마음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현실에선 두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자꾸만 상상되는 미지의 두려움이 나를 괴롭혀서일까? 내 맘이 부려대는 오기가 어느새 용기로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나의 간절함이 이겼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이 여행을 포기할까 봐 무작정 티켓부터 질렀다. 자전거 타고 세계 일주할 시작할 날짜는 누군가에게는 거짓말로 들릴 만우절. 내 첫 여행 목적지는 심리적으로 장벽이 낮은 중국으로 정했다. 학생 때 자주 다닌 배낭여행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기간 출발 전까지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일을 해야 했다.
'난 지금 나의 인생 어디에 와 있을까?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독도법(지도를 보는 방법)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나의 위치 파악이다. 그러나 당장의 위치를 알 수 없다면 움직여서 주변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 겨우 지도만일까? 인생도 비슷하다. 난 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나와 상황을 알아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잖아."
동화에서 나온 그 말이 내겐 해당되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적으로, 심적으로 헤맬 시간을 아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를 헤매는지는 조차 잘 몰랐다. 다만 내가 가고 싶은 도시와 방향이 있으니까 괜찮았다. 계획한 쪽으로 페달을 밟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주변을 살피고 수정해 나가면서 이 여정을 계속해 나가면 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답답한 현실 속 상황이었다.
희한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나의 인생을 산다는 실감이 났다. 멋진 표현으로는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고, 현실적인 표현으로는 삶의 유한성이란 것을 정말 이만큼 크게 느낀 적이 없어서 꿈에서 깨어나 행동해야 했다.
통장에 약 150만 원의 현금, 중국 인민폐와 달러를 섞어 총 300만 원 정도의 예산으로 중국 칭다오로 자전거 세계일주를 떠났다. '인생은 정말 긴 여행이다.'고들 한다. 이 말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의 인생처럼, 금방 끝날 것만 같았던 이 여정은 무려 8년이 지나고 나서야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