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이 해준 말
돈을 벌며 얻은 안정감은 외모로 풍기는 분위기마저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교회 어린이들이 머리를 자르고 나타난 내 얼굴을 보고 달라진 얼굴색과 밝은 느낌에 놀라 하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지던 순간이었다. 매일이 극도로 피곤한 나날이었음에도 돈 버는 재미로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호주 이후 다시 시작한 세계 여행을 6년 넘도록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요즘엔 어느 때보다 '하고 싶은 거 하고 사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도 이 말에 백번 동감한다. 이 말대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싫은 것을 하고 싶은 것으로 삼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위 말의 생략된 맥락 때문일까?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정작 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시작을 자기도 잘 모르는 자신의 단순한 기호(좋아함)를 기준으로 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좋아한다 싶은 일도 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금방 내팽개쳐버리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본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처럼 한 가지 일을 짧게 해 본 것과 긴 시간 해본 것은 차이가 크다. 이소룡이 그랬다지. '나는 만 개의 발차기를 한 번 연습한 사람보다, 한 번의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더 두렵다.'라고. 하다 보니 좋아하는지, 좋아해도 긴 시간 하면 질려서 싫증 나는지, 안 질려서 좋아하는지, 단순하지만 장시간 해도 어려움이 없어서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아도 생각보다 질리지 않아서 할 만한지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체감의 정도는 더 크다.
한 곳에서 한 달 이상의 일을 계속해 보는 것은 호주가 처음이었다. 내가 호주에 가기 전 해 본 일이라곤 시급이 센 공사판 일이나 택배 상하차 정도만 해 본 게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호주에서 일을 해보기 전까지 일이란 단순히 시간과 노동을 팔아 돈과 바꾸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어떤 직업은 그렇다.)
내가 첫 번째 한 일은 호주의 광산 지역에서 가져온 돌가루를 유리가루(Flux)에 섞어 고열의 기계로 녹인 후 동전 모양의 샘플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만든 샘플은 X-ray 검사를 통해 내부 성분을 분석하는데 쓰인다. 광산업체는 우리 회사가 만든 분석 정보를 토대로 필요한 광물들이 많은 지점을 집중적으로 캐내기 위한 용도로 쓴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고, 호주가 아니었으면 못 해볼 경험과 느낌이었다.
돌공장의 실험실에서는 뜨거운 기계를 만지며 작은 동작을 반복하는 작업을 했다. 반대로 고기 공장에서는 거대한 냉장고 속에서 도축된 생고기를 담고 박스에 포장한다. 차곡차곡 테트리스 하듯 정리해서 화물차로 실어 보내는 게 전부인 단순 신체 노동의 반복이었다. 염려가 없진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일을 썩 잘 해냈다. 슈퍼바이저로부터 오버타임을 요청을 받아가면서.
일을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구직을 하는 동안 마음속에 내가 세운 벽이 있었다는 것을. 일자리를 선택하는데 만만한 곳만을 골라 지원했었고 돌공장 일자리도 절반은 얼떨결에 된 것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어도 언어, 문화가 다른 곳에서의 인간관계, 조직 적응력 등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마음의 벽이었다.
일자리를 선택하는데 모든 곳을 찔러보아야 했었을까? 행동 후 결과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그제야 그 벽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걸 알았다. 또 그 벽이 나 자신이 만든 걸 알았다. 그 깨달음은 자전거 세계여행을 시작할 때 중국에서 겪은 고생이 생각보다 견딜만하다는 경험과 자신감이 이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일은 돈을 얻기 위해 한 선택이었다. 남들에게 별것 아닌 과정이지만 내가 이때의 일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컸다.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고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큰 통찰이 된다. 내게 노동, 곧 행동이 준 깨달음은 그랬다.
그 '때'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명확했다. 해봐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걸 이제야 알았어?'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온몸으로 깨닫는 때의 시간차는 언제나 생기기 마련인걸 어쩌겠나? 괜히 '지금 알고 있는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란 말이 나오는 게 아니지. 에휴.
이소룡이 한 말 함의를 호주에서 일을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평생 나와 살아왔지만 몰랐던 나라는 부분을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호주를 경험하며 어렴풋이 알던 개념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일이야 반년 정도였지만 여행으로 8년이란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나서야 그 의미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이 깨달음은 호주 이후의 여행이 수년간 지속되도록 만든 호기심의 바탕이기도 했다. 땡큐, 소룡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