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스러운 할배 되기
강산이 변할 정도의 시간을 돌아다니며 느낀 바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외여행이 쉬워졌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 보기가 어렵지 않다. (지금의 코로나 시국은 예외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같은 나라 사람은 반갑다. 첫 대화는 그럭저럭 흘러가도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으레 겪는 일이 있다. 말투 결정을 위한 서열정리다. 얼마 안 가 말투로 형성되는 관계 때문에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나이로 사람의 상하가 나눠지는 게 아닐 텐데, 자연스레 아랫것 취급(?)당하는 상황에선 대화 자체가 불편해진다. 더군다나 단체 여행이라면 말을 놓고 가는 분위기에서는 정색하기에도 어색한 분위기다. 회사나 사회생활에서 겪을 법한 일을 외국 여행지에 와서 겪는 것은 굉장히 짜증스럽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건데.
대화로 원만히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잠재적인 갈등 요소다. 특히 긴 시간 같은 루트로 다녀야 한다면 앞으로 남은 여행 기간 동안 문제가 터지는 건 시한폭탄과 같다.
중국 윈난 성을 여행할 때였다. 우연히 이동루트가 맞아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들을 만났고, 같은 장소에서 하루 저녁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올랐다. 술의 기운을 빌려서일까? 나이 많은 한 여행객이 모든 사람이 듣는 사람 앞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 친구가 뭘 생각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젊으면 돈을 벌어야지. 내 딸이 저런 남자 데려 올까 봐 정말 무섭네.”
불룩한 배에 얼굴에 술이 돌아 벌건 모양새로 가득한 다른 중년의 남자도 거든다.
“나처럼 사업해서 돈 크게 벌어야 국력도 강해지고, 국가 위상이 올라가지. 젊은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참, 기분이 언짢아지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소리도 아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참 곤혹스럽다. 생각 없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돈을 못 버는 게 아니라 버는 시기를 늦춘 건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려고 이렇게 여행 중인 건데.
앞선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 벌어 나라에 충성한다는 사람이 왜 밖에 나와서 놀고 있는지. 한국에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업하고 직원들 봉급 올려서 가처분 소득 늘려줘야 나라가 잘살지, 내수 경제 활성화에 신경은 안 쓰고 밖에 나와서 저렇게 외화 낭비나 하고 있으니.
내 생각이 너무 삐딱선인 걸까?
내 행색과 생각이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차이가 커서였을까? 여행 중 만난 장기 여행자들 또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는 걸 보면 속칭, 꼰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은가 보다.
“끝나고 뭐 해 먹고 살 건데?”
“결혼은 하겠어?”
“한국에서 할 일이 없어서 이렇게 나왔지? 외국에선 적당히 못 사는 나라 여자 하나 잡아서 결혼하고 자전거 타듯이 열심히 살면 뭐라고 하겠지, 안 그래?”
“그 나이 돼서 마련한 것도 없으면 여자도 못 만나요. 취직 자리는 있어요?”
"기분 나빠하면 안 돼,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평생 모르고 살던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걱정을 해주는 걸까? 별로 부러운 대상도 아닌 사람들이 관심을 가장한 간섭과 충고를 이렇게 해대는 건지. 상호 간 지켜야 할 예의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실제로 겪었던 여러 사례가 성급한 일반화라 생각했었다. 물론 인터넷에 떠돌던 글이 아닌 실제로 꼰대를 경험한 여행자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샐리가 없지. 그들은 남의 기분을 왜 그렇게 망치려 했을까.
세대 간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알기에 여행 중 만나는 상대와 적정한 마음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한 뾰족한 거리두기라고만 생각했었지만 나도 알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도 안다. 저런 어른이 되기 싫다는 걸. 머리가 굵어지며 알아가는 세상과 어른들에 생긴 반항심이 나뿐만 아닐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난 일부를 더 많이 겪었다. 사실 세상엔 멋진 어른도 존재하고 닮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나이 먹는 건 막을 수 없어도 나이 드는 모습은 내가 만들 수 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만 해도 노년에 어떻게 되고 싶다는 소망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었지만 여행 중 만나는 배울만한 분들을 통해 미래의 나로 밑그림을 조금씩 그려보게 된다.
폼나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은 억척스러움과 고생이 있음에도 티 내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할배가 되면 꼭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감정과 남의 감정도 잘 살피는 소년 같은 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