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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Oct 18. 2020

조금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잘 쓰면 어떠고 못 쓰면 어떠랴



  실컷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냉장고에 있는 거 대충 꺼내 먹는 밥이 브런치 아니던가. 덜 깬 잠 위로 내리쬐는 빛을 맞이하며 입에 뭐가 들어간지도 몰라 이로 꾹꾹 누르고 씹어 삼키는 밥. 맛있던 맛없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에 처음 작가 신청을 하며 꿈꿨던 것들은 애저녁에 허공으로 증발해버렸고, 멋들어진 글로 완벽한 타인의 심금을 울리겠다는 포부는 시들시들해졌다.(성실하지 못하고 타고난 재능이 없기 때문에) 모처럼 가진 글을 위한 공간인데 내버려 두기는 아쉽고 꽉꽉 채우기엔 능력이 없고. 그래서 그냥 아무거나 손 가는 대로 써보기로 했다. 세대를 풍미했던 싸이월드가 완전히 사라져 포도알을 적립할 데도 없어졌으니 여기에라도 이런저런 일을 기록하려 한다.


  먼저, 이번 학기에 대학생이 되었다. 꿈꾸던 문예창작학과로. 생업을 죄다 때려치우고 학교로 달려가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사이버대로 편입을 했다. 고등부 수업까지 끝나고 무거운 몸 질질 끌고 들어와 수업을 하고 과제를 제출하는 게 녹록지 않지만, 하고 싶었던 공부이기에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아, “그” 수업 빼고. 문학에 정치라는 MSG를 팍팍 퍼붓는 그 교수님. 적절한 조미료는 음식을 맛깔나게 해 준다. 하지만 과하게 넣으면 자극적일 뿐 아니라 음식을 먹고 난 후엔 갈증이 나 계속 물을 찾아 마시게 된다.


  문학은 문학이고 정치는 정치다, 혹은 둘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상관관계를 파악하여 알아야 한다. 문학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수학 문제를 풀고 이게 맞는지 틀린 지 확인하려면 책 뒤에 붙어 있거나 부록지로 따라오는 답지를 보면 되고, 답이 이해되지 않으면 친절한 해설지를 읽으면 된다. 그런데 문학은 답지도 해설지도 없다. 심지어 문제조차도 제기되지 않는다. 백지 한 장 던져주고 답을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주관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그 주관이 맞는 답인가? 당연히 아니지 않나.



  “공대 교수님들은 아는 게 많아. 근데 그게 그만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거 같아. 아웃풋은 어마어마한데 그게 무지한 대학생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 교수님들은 그게 답답하고. 이렇게 쉬운 데 왜 모르지? 생각하면서. 자동차에 붙어 있는 장식품처럼 흔들리는 대로 고개 끄덕끄덕하며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그게 실험과 관측을 통한 과학적 지식이기 때문이지. 결과와 수치가 그걸 말해주잖아. 그걸 반박하는 순간, 새로운 이론이 탄생하는 거지.”


  “그런데 인문대 교수님들은 잘 모르겠어. 수업을 듣고 있으면 물음표가 끊임없이 쏟아지지. 필기하면서 멈칫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맥아더를 존경해야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재평가되어야 한다, 친일 작가들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듣고 있으면 뭔가 세뇌되고 있다는 느낌이야. 좀 어렸을 때 공부했으면 바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간이 인간을 공부하고 배우는 과정에 들어간 개인의 감정이 절대적인 지식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


  분노 버튼은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내용에서 눌러졌다. 나뿐 아니라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이도. 문학작품에 대해 배우고 작품 분석을 하며 의견을 나눌 줄 알았던 자유게시판이 교수의 잘못을 지적하는 글과 시녀질(혹은 내시질)하는 글로 범벅이 되는 걸 보며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업 말고는 다 좋은데 그 하나가 좋은 백을 다 뒤덮어버린다. 뭐, 원래 사람이 그런 거 아니겠나. 마냥 좋다가도 바늘 하나에 쓰러지는 거. 아무튼 그렇다. 나는 편입생이 되어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분노도 하고 의문도 가지면서 글도 쓰고 책도 보고 시험 준비도 한다.


  (한 마디 더 붙이고 싶은 게 있는데 : 교수의 자기변호 글을 보며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다 대단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민주화 운동을 하고 좌파 이념을 잘 안다고 하는데... 그냥 그 시대의 흐름 혹은 유행이나 개인의 명예-나중에 어디 가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말을 하려고-글 위한 소소한 노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교수님도 주관적인 걸 피력했으니 내 주관도 내비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세상은 넓고 씹어 삼킬 건 넘쳐난다. 배울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매일 파도처럼 밀려온다. 낭만적이라 생각했던 것들에 실망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다시 들춰보고. 아름다운 학문이라 믿었던 게 별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차라리 공학이 더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타인과 낯선 생각을 품을 줄 아는 것 같다. 다시 과학과 수학을 공부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거짓을 판단하여 올바른 정답에 줄을 긋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쉽고 간단한 공부인가 싶다. 앞으로 일 년 반, 내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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