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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Feb 06. 2021

시곗바늘을 돌려 (     )로 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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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만 꾸준한 아이들이 있다. 한 칸을 채우기 위해 꼼꼼하게 색을 칠하느라 시간은 걸리지만, 그 안에서도 속도 차이가 있어 흰 공간을 메우는데 노력이 더 필요하지만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여유를 찾게 된다. 수업 전에 도둑잡기 게임 한 번 하면 안 되나요, 오늘은 조금 힘들어요, 숙제가 많은 것 같아요. 귀여운 투정을 부리면 나도 모르게 그럴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은 한 학기 진도를 다 마쳐서 문제풀이를 하고 질문을 받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은 하루에 두어 개씩 이제껏 공부했던 내용 중에 다시 듣고 싶은 거나 궁금했던 것을 조곤조곤 물어온다. 이상하게도 다른 학년 아이들에게는 엄하게 작용하는 잣대가 이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풀어지곤 한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애들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 속 한 번 썩이지 않고 고만고만 잘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바쁘게 달리다가도 이 아이들 앞에서는 숨을 고를 수 있다. 내 어깨 근처에 머리가 올랑 말랑 하던 아이들이 훌쩍 클 정도의 시간이 관계에 여유로움을 가져다준 것 같다.


  가끔 아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준다. 만약이라는 가정 뒤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붙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생각을 머리에만 갖고 있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 함께 나눠보곤 한다. 시답지 않은 질문도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얼마 전,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저는 세 살 때로 가고 싶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이랑 공부한 거 그대로 다 기억한 채로요. 그럼 뭐든지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클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어른스러운 아이의 답변이었다. 예의 바르고 해야 할 걸 스스로 찾아 하고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 밝은 만큼 어두운 면이 있는 그 아이에게 나는 가끔 그냥 애처럼, 네 나이처럼 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곤 했다. 한 번쯤 숙제 안 해오면 어떠냐고,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서 뭐 하냐고. 지금은 지금 나이 때에 맞게 행동하더라도 괜찮다고. 그 아이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돌아온 답 중에 가장 쓴 답이었다.



  “저는 열 살 때요. 그때 검도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달리기 하다가 넘어져서 이가 깨졌어요. 그거 치료받느라 검도 그만뒀는데, 다시 돌아가면 안 넘어지게 조심하고 검도도 계속하고 싶어요.”


  다른 애들도 이 아이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앞니에 대한 이야기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에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요즘 어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놀러도 못 가니 답답함에 검도를 배웠던 때를 떠올렸나 보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종종 친한 애들과 함께 근처 공원으로 자주 놀러 가던 애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해볼 거냐 되물으니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 인다.



  “여섯 살 때요. 저를 엄청 괴롭혔던 애가 있었거든요. 왜 그랬는지 이유도 모르고 당하기만 했는데, 그때로 돌아가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어렸을 때의 일인데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가 저를 어떻게 괴롭혔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어떤 감정이었는지까지.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어째서 행복은 빨리 휘발되고 슬픔은 흉터로 바뀌는지. 여섯 살 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꾹꾹 눌러 가지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가 안쓰러웠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힘들었던 기억이 희미해질 수 있을까.



  “저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저도요!”


  한 아이의 대답에 뒤에 앉아 있던 아이도 냉큼 저도 그렇다며 손을 번쩍 든다. 두 아이는 이제 막 친해진 사이었다. 일 년 넘게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아 일부러 같이 앉히기도 했고 잡담을 나누더라도 눈감아 주던 애들이었다. 지금이 제일 좋고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건 별로란다. 차라리 빨리 스무 살,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 시간이 두 아이에게는 느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다시 묻자 딱히 없단다. 그냥 어른이 되어 보고 싶다고 했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다 보면 그 애들이 원하는 나이가 되는 건 순식간일 거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면 아이들에게 내 대답을 들려준다. 나도 마지막으로 답했던 두 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었다. 돌이키고 싶은 사건도 없다. 후회되는 일이 있을지언정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 똑같은 실수를 할 것 같다. 그리고 똑같이 아파할 거다. 아이들은 내 대답이 재미없는지 에이, 하는 소리를 한입으로 모아 냈다.


  아이들이 다시 샤프를 잡고 연습장을 넘겼다. 나와 긴 시간 합을 맞춰돈 아이들은 대화의 시작과 끝맺음을 정확히 안다. 우리의 짧은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애들아. 이제 다시 공부하자!’하는 말이 없어도 아이들은 저들이 해야 할 일로 돌아간다.


  지나온 시간이 가끔 그립긴 하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순간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기회들이. 그리고 잃어버린 추억들이.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는 지금의 내가 나쁘지 않다. 괜히 타임 터너를 돌려 과거로 돌아가 지금의 나를 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타임 터너는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나를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다. 급하게 달려갈 필요가 없으니, 얌전히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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