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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Feb 20. 2021

34.2mhz 주파수를 맞춰라

세상을 들려주는 라디오




  멜론과 플로 정기결제를 끊었다. 듣고 싶은 노래 한 두곡을 위해 다달이 돈을 쓰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이다. 스밍을 돌리고 그 횟수로 팬심을 인증받는 게 더는 필요 없어진 이유도 있다. 한 달에 100곡 무료 듣기와 다운 받아 둔 노래로 ‘듣는’ 행위는 충분했다. 원래 듣는 것에 대한 편식이 심했고, 새 것을 찾아 듣기보다는 듣던 것만 듣는 편이라 굳이 음원 사이트 스밍 서비스를 결제하지 않아도 그냥저냥 지낼만했다.


  그러다가 라디오 어플을 깔았다. 라디오 디제이로 활동하는 한 사람에게 관심이 생겼기에 그가 진행라는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다. 생각이 좋고, 그 생각을 글로 잘 풀어내고, 거기에 목소리까지 좋으니 ‘한 번 들어볼까?’ 하는 마음에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원래 라디오를 좋아했었으니 싫을 이유가 없었다. 채널을 돌려가고 안테나를 조절해가며 라디오를 들었던 열세 살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새벽 감성 촉촉하게 젖은 프로가 좋아 잠을 참고 아침에 눈 비비며 겨우 일어나 학교에 가곤 했던 어린 날. 또래와 달리 나는 보는 즐거움보다 듣는 즐거움을 추구했다.


  내가 보낸 사연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거나 전화 연결이 되어 디제이나 게스트와 통화해보는 게 작은 소원 중 하나였다. 핸드폰이 없던 때라 인터넷 게시판이나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고 안내되는 번호를 손가락에 불이 나게 눌렀지만, 원하는 바를 한 번도 이뤄내지 못했었다. 이런 거 당첨되는 사람은 정말 운이 좋거나 신박한 사연이 있어서 그렇겠지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곤 했다. 나중에 크면 언젠간 한 번은 내 이름이 라디오 주파를 타고 전국에 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긴 나날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소박한 소원이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에 실려 다른 이에게 전해지는 것. 혹은 내 작은 고민이 다른 사람과 공유되어 위로받고 조언받는 것.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간절한 소원이었다.


  오랫동안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잘 듣지 않게 되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교복 재킷 안으로 이어폰을 끼워 넣고 몰래 듣기도 했고, 아침에 잠을 깨기 위해 습관적으로 틀기도 했던 라디오였는데. 라디오 말고도 삶의 배경음악이 많아진 게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라디오 말고는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 힘들었던 전과 달리 지금은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스스로의 사연에 치여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졌으니까. 일상에서 라디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도 틀어놓는 곳도 없는 것 같다. 요즘 애들은 둥근 휠을 돌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방법도 모를 거다. 조금만 틀어져도 지지직 거리던 기계음도 모르겠지. 그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은 어느새부턴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튼, 다시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어플을 켜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주파수가 오차 없이 정확히 맞춰지고, 지직지직 끓는 방해음도 없다. 101.1 mhz가 107.7 mhz로 주파수가 변하기까지 20년이 흘렀다. 스마트 폰으로 느끼는 아날로그 감성. 모순적이고 생소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하다. 삶의 배경에 다시 소리가 덧입혀졌다. 지금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당연한 소리가 될 터다. 당분간은 즐겁게 라디오를 듣기로 했다. 어렸을 때처럼 라디오에 보낼 엽서를 손으로 써보기도 하고, 어렸을 때와 달리 문자를 보내보기도 하며.


  매일 퇴근 후의 밤이 기다려진다. 씻고 누워서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고 할 일을 하는 시간이 즐겁고 설렌다. 내가 만든 선곡표가 아닌, 디제이가 만든(혹은 라디오 작가가 만든) 선곡표의 노래를 들으며. 몰랐던 노래를 알고 싫어하는 노래도 듣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반가워하면서 편식하는 습관도 고치고. 다시금 라디오의 매력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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