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카드 말고 남 카드긴 하지만
시험기간이다. 나도, 애들도. 거기에 과제로 내야 할 소설 두 편을 꾸역꾸역 쓰는 중이고 미라클 모닝-다른 사람보다는 늦은 아침이지만, 내 기준 미라클 한 기상시간이다-을 실천 중이며 하루에 5~6천 걸음을 억지로라도 걷고 있다. 구구절절 근황을 보고 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여전히, 열심히 사는 중이다. 눈이 반쯤 감기는 이 와중에도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게으르게 사는 건 나랑 안 맞는 것 같다.
얼마 전, 내 능력으로는 먹으러 가기 힘든 식당에 갔다. 한 끼에 다달이 내는 월세의 절반을 지불해야 하는 고급 식당이었는데, 맛있는 거로는 물론 분위기까지 완벽해서 SNS 인플루언서 사이에도 유명한 곳이었다. 살다가 이런데도 다 와보네 싶었다. 예약 없이는 발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매일 모든 테이블이 꽉 찬단다. 메뉴판에 적힌 금액은 내 카드로는 선뜻 긁지 못할 터였다. 접시에 놓인 두툼한 고기를 나이프로 꾹 눌러 비비자 육즙이 먹음직스럽게 흘러나왔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맛에 절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엄청난 맛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슷한 맛인 파스타나 스테이크는 이전에도 먹어본 적 있은 맛이었고, 가격은 이 식당의 반의 반 값인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음식은 분명히 엄청났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도 포크를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조도 낮은 불빛과 화려한 조명,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인테리어와 친절한 직원들. 가격의 반 이상은 공간과 서비스가 차지하고 있을 거다. 게다가 핫플레이스로 유명한 동네였으니.
입가심으로 샐러드를 한입 크게 가득 물었다. 알싸한 마늘향이 신선한 야채와 잘 어우러졌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헛웃음이 났다. 건너편에는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이 있었다. 거기도 나름 유명한 샤브샤브 체인점이었다. 그리 비싸지도 않고 마음만 먹으면 여기가 아니어도 다른 동네에서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먹으러 다닌 곳이기도 해서 나에게는 익숙한 맛, 친숙한 식당이었다. 우연히 기회가 되어 이 비싼 식당에 앉아 자주 가던 식당을 바라보고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했다. 어떤 이들은 여길 매일같이 와서 샤브샤브를 파는 식당을 보며 저런 데도 있구나 하겠지. 나는 주로 건너편에 앉아 저런데 갈 돈 아껴서 샤브샤브 백 번 먹겠다고 말했었는데. 두 식당은 좁은 일방통행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손님의 교집합이 없어 서로 서운할 일은 없겠지 싶다.
스테이크 한 입, 파스타 두 입, 드레싱에 축축하게 젖은 샐러드 조금. 다 먹지 못한 메뉴가 테이블에 남아 있었다. 예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비싼 케이크 시켜 먹으면서 꼭 한 입씩 접시에 남기는지 모르겠다고. 많이도 아니고 딱 한 입거리. 접시 설거지하는 게 귀찮아 죽겠다며 투덜거리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이 식당에서도 한 입의 음식이 남았다. 내가 있는 테이블뿐 아니라 다른 테이블에도 완벽히 빈 접시는 없다.
“이제 갈까요?”
밖이 제법 어두웠다. 식당 영업시간도 30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한 바퀴 돌려봤다. 샹들리에의 빛이 은은하게 흔들렸다. 여기에 다시 올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