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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May 02. 2021

작은 정성이 담긴 촌지

돈 받은 선생님이 만들어준 추억




  선생님이 싫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호칭을 내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에게 “길에서 나 만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고 말한다. 그럼 뭐라고 부르냐 깔깔 웃으며 되묻는 아이들에게 “아줌마라고 불러.” 하고 답해준다. 타인 앞에서 선생님이라는 소리 듣는 게 민망스럽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이다.


  처음부터 선생님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내가 학생일 때만 해도 체벌이 당연했고 고압적인 선생님의 이미지가 만연했다. 선생님의 눈에 나지 않으려고 고분고분하게, 숙제나 준비물 한 번 빠뜨리지 않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하며 평범하게 지냈다. 또래 친구들은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을 떠올리며 치를 떨기도 했다. 억울한 일을 겪었다, 이유 없이 맞았다, 교복 치마 단속에 두발 단속까지 짜증 나는 상황이 많았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학교라는 삼각김밥 틀에 규격화된 김을 깔고 개수도 엇비슷하게 눌러 담은 밥알, 거기에 찍혀 나온 정형화된 김밥. 선생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는 상대가 무언가 잘못했겠지, 김밥의 조건에 미달됐거나 아니면 김밥이길 거부했겠지. 대충 상대의 토로를 다독여주고 생각을 삼키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곤 했다.



  “네가 선생을 잘 만났나 보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운이 얼마나 좋았는지 만나는 담임은 친절했고 다정했고 참교육자였다. 어린 초등학생 시절이 그나마 행복하고 즐거웠던 건,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톡톡히 한몫했다. 생활기록부의 문장은 완벽했고 성적 또한 ‘수’가 가득했다. 완벽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단어가 없는 국민학교-초등학교 4년의 시간이었다.


  스물다섯의 어중간한 어른이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 이야기까지 흘러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문장이 너무 충격적이라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댔던 적이 있다.



  “내가 니 담임한테 돈을 얼마나 갖다 바쳤는 줄 아니?”

  “담임 선생님한테 돈을 줬다고? 왜?”

  “너 때문에.”



  나? 내가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



  “네가 하도 성격이 이상하고 유별나서 친구 못 사귈까 봐 그랬지.”



  그 한마디에 짝꿍들이 떠올랐다. 걔들은 모두 엄마의 돈 봉투를 받은 담임이 이어준 애들이었던 거다. 잘 짜인 각본과 훌륭하고 어린 연기자들. 어른의 입김은 생각보다 강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친했던 친구들은 1년 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다음 학기에 또 같은 반이 돼도 전년도처럼 잘 지내지도 못했다. 나는 그게 당연한 ‘친구’ 관계인 줄 알았다.


  학교 생활이 어려워진 건 5학년 때였다. 담임은 나를 대놓고 싫어했다. 시험에서 1등을 하고, 특별반 수업에 뽑혀도 담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3줄, 4줄로 꽉꽉 찼던 일기장 피드백은 한 줄 혹은 도장 하나로 끝이 났다.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그래서 담임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며 애를 썼다. 그렇게 아등바등했지만, 담임은 끝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선생님의 1번 픽이었던 지난 4년과는 확연히 다른 6개월이었다.


  내가 5학년이었던 그 해, 한 학기만 다니다가 전학할 계획이었기에 엄마는 매년 준비했던 돈봉투를 선생에게 건네지 않았건 거다. 이사 간 큰 도시의 학교에서도 엄마는 돈봉투를 선생에게 찔러 줬었을까? 세월에 푹 파묻혀 있던 비밀. 그 비밀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고운 눈으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선생님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뿐 아니었을 거다. 교실 안의 위계는 봉투 안의 금액이 지배하고 있었겠지. 누구 엄마 얼마, 누구 엄마가 또 얼마. 엄마들의 돈봉투가 얼마나 오갔을까. 아이들의 뒤에서 이뤄진 은밀한 거래. 차라리 끝내 몰랐더라면 좋았을 거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우리 선생님은 안 그랬어, 하고 반박할 수 있었을 텐데.


  달력의 15. 숫자 위에 눈이 멈췄다. 스승의 날. 어린 시절을 통째로 뽑아내다 버린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그리고 나도 선생님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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