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를 위한 세상이 오면 좋겠다, 노력한만큼 돌아오는.
허심탄회하게 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생기면, 그리고 내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 한때 글로 밥을 먹고 싶었던 나는 학원에서 만났던 다양한 아이들에 대해, 혹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모아 책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모든 글의 첫 문장이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듯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 K에 대한 이야기다.
K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21살, K가 14살이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의 꼭대기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위해 발을 더듬거릴 때였고, K는 아직 작은 아이였다. 학원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후 처음 가르쳤던 학생들 중 하나였던 K는 밝고 활달한 아이였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학원 선생님 뿐 아니라 주변 어른들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해서 예쁨을 받았다. 빼어나게 잘 생기거나, 훤칠하게 키가 크거나 혹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K에게 눈길이 자꾸 갔다.
K는 형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물건도 씩씩하게 잘 쓰고, 부모님에게 투정한번 부리지 않는 성숙한 꼬맹이었다. K는 내 반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성적이 높은 아이들을 데리고 반을 만들어 수업을 진행했고, K는 다른 반이었다. K는 다음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내 반으로 왔다. 나중에 물어보니 저도 공부 잘하는 반에 들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었다. K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이의 천성처럼 성적 또한 정직했다. 딱 한만큼, 혹은 그것보다 덜한 성적들. 그래서 아이는 그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수업 중에 제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풀고 또 풀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마음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버럭 소리를 한번 지르며 책을 구겼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푹 쉬며 구겨진 책을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가며 펴고는 다시 문제를 풀었다. K는 제 분에 이기지 못해 책을 구기고 나면 꼭 나에게 사과했다.
“쌤, 죄송해요. 문제 이해가 안 되니까 저한테 자꾸 화가 나요.”
행여 제 행동이 나에게 오해를 살까봐 꼬박꼬박 사과를 하던 아이. 나는 K가 책이나 노트를 구기거나 찢으면 그냥 지켜봐주고 옆에 가서 토닥여주곤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K가 그의 방식대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이해해주려고 노력했다. 찢어진 부분은 다음날이 되면 엉성하게나마 테이프로 붙여 가지고 오던 K가 참 귀여웠다.
K는 절대 기죽지 않는 아이였다. 주변 친구들이 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지만 K는 핸드폰이 없었다. 내 기억에 K는 또래 아이들 중 가장 늦게 제 핸드폰을 가졌던 것 같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거나, 저희들끼리 밤늦게까지 연락을 하며 놀아도 그것에 대해 부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넌지시 너는 핸드폰 가지고 싶지 않느냐 물으면 머쓱하게 웃으며 아, 저는 괜찮아요. 말하곤 제 친구들과 다시 어울렸다. K는 가방끈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가방을 가지고 다니던 아이였다. 과거에 비해 풍요로운 삶을 사는 아이들은 유행에 따라 혹은 제 취향에 따라 갖고 싶은 가방을 사곤 했지만, K는 꽤 오랫동안 제 낡은 가방을 투정한번 하지 않고 잘 가지고 다녔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을 하라고 돈을 쥐어주면 절대 다 쓰지 않고 몇 천원, 몇 백원 꼭꼭 남겨오는 아이였다. K와 함께 간 아이들이 그냥 다 써도 쌤이 아무 말 하지 않을 거라 말해도 K는 절대 내가 쥐어준 돈을 모두 쓰지 않았다. 내 카드를 맡겨 심부름을 보내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K는 착하고 바른 아이였다.
K가 고3이 되었을 때 쯤, 내가 일하던 학원은 사정이 생겨 정리하게 되었고 나는 다른 곳으로 옮겨가 일을 시작했다. K는 명절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꼬박꼬박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 연락해왔다. 덕분에 나는 K와 꾸준히 연락했다. K가 고3이 된 봄, 나는 K에게 전해줄 수학문제집을 챙겨들고 K를 만났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온 탓에 K의 가방은 매우 무거웠다. 나는 K에게 내가 끊은 인터넷강의를 듣는 방법을 알려주고 강의에 쓸 책을 건네주었다. K는 많이 지쳐보였다. 고3이 시작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K는 나에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쌤. 저희 반에 벌써부터 재수를 생각하는 애들이 있어요. 어차피 재수 할 거니까 올 한해는 그냥 편하게 놀아도 된다며 속 편한 소리를 하는 애들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빠져요. 문제지 하나 살 때 고민 없이 부모님이 주시는 돈 받고, 학원이나 과외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잘 사는 애들이 부러워요.”
나는 K의 이야기를 듣자 뒤통수를 한 대 쾅 얻어맞은 것 같았다. 코끝이 찡해졌다. 항상 밝고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았던 K. 그냥 누구는 좋겠다, 하며 지나가는 소리를 하는 건 종종 들었지만 그렇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건 처음 봤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날 이야기였다. 집이 잘 살아야 투자를 하고, 그 투자를 받은 아이들은 빗물과 햇빛을 잔뜩 먹은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야 한다. 마음이 아팠다. 돈 때문에, 그깟 돈이 뭐라고. K에게 사회의 추잡하고 더러운 현실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내 내 표정을 읽은 K는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고요, 하는 말로 내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K는 나보다 어렸지만 나보다 어른이었다. 제 상황에 얼마든지 삐뚤어져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K는 고3을 꾸역꾸역 잘 이겨냈다.
K에게 나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몇 걸음 더 앞서 있는 어른인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에 대한 책임감이나 얄팍한 동정심은 아니었다. 그냥 문득 세상에는 K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나이에 맞게 살지 못하고 애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아이들. 주변 어른들은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어른스럽구나.’ 하며 속 좋은 소리나 해주고 있겠지. K는 얼마나 세상을 원망하며 자랐을까.
얼마 전 K를 만났다. K는 대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군인이다. K는 부대 안에서 오랫동안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일 텐데도 나에게 전화를 해온다.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제법 굵어져있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휴가를 나온 K가 복귀하기 전 잠깐 만났다. 군복을 입고 활짝 웃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던 K. 어린 아이의 얼굴은 싹 씻겨 나갔고 이제 청년의 모습이었다. K는 나에게 여전하다고 했고, 나는 K에게 올곧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고3 K의 고민을 들어주던 나는 이제 K의 취업 고민을 들어주고 있다. 나는 어른이지만 K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아마 K가 제대한 후에도 한심한 세상의 어른으로서 K에게 미안한 마음 뿐일 것이다.
K는 내 아픈 손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