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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Mar 23. 2016

오늘 있었던 일.

하루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대한민국 사람들의 하루키병.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그의 대표작이자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작품이다. 나에게 하루키는 파울로 코엘료와 함께 ‘믿고 보는 작가’이다. 일단,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무조건 산다. 내용이 재미있던 재미없던 일단 사서 읽어본다. 그중에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읽고 또 읽는 책도 있지만 한번 읽고 이번 건 별로네 하곤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하는 책도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읽고 또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어떤 날은 와타나베의 시점에서 글을 읽고, 또 다른 날은 나오코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미도리가 되기도 한다. 책 안에서 소개되는 음악은 인터넷을 뒤져 들어보았고, 영화화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찾아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참 視視한 영화였겠지만 나에게는 詩詩한 영화였다. 물론 책의 감동을 영상이 따라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루키 음악회도 찾아가 그의 작품 안에 나오는 음악과 글에 대한 해석을 한데 버무려 실컷 즐기고 오기도 했다.    


  열여덟, 초여름.    


  내 생일날 같은 반이었던 친구 둘이 쉬는 시간에 내 자리로 왔다. 생일 축하해, 하며 내게 건넨 책 한권.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친구 둘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이거, 읽었어? 사정은 이랬다. 두 친구는 내 생일을 뒤늦게 알고는 점심시간에 외출증을 끊어 근처 서점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나를 알기에 둘은 서점을 돌고 또 돌며 내가 읽지 않았을법한 책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러다가 고르고 또 고른 책이 <어둠의 저편>이었다. 책 앞에 생일축하 메시지를 적어 내게 건넨 친구 둘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저희들이 얼마나 힘들게 내 선물을 골라왔는지에 대한 무용담을 펼쳤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거, 읽었어.    


  에리와 마리의 이야기. 에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에서 깨지 않았고 그런 에리와 한 지붕 아래 있는 게 견딜 수 없었던 마리는 두꺼운 책과 소지품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어 밖으로 나왔다. 어제가 끝나고 오늘이 되는 과정, 그 7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던 소설. <어둠의 저편>은 쉽게 술술 읽혔고 무거운 감정들이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서술된 내용이라 부담스럽지 않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나는 쉽게 읽히는 글보다는 힘들게 읽히는 글을 더 좋아하던 터라 - 어린 시절의 치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쉽게 슥슥 넘어가는 글을 더 좋아한다. - 크게 마음에 남겨둔 책이 아니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나는 그 책을 선물로 받아 가지게 되었다.    


  오늘, 아직 꽃샘추위의 흔적이 남아 허공을 맴도는 초봄.    


  책을 몇 권 샀다. 번쩍이는 화면에 박힌 글이 아니라 종이에 인쇄 된 글씨를 본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는데, 바쁜 일상 때문에 책을 펼 시간이 없었다. 몇 주가 지나고 오늘이 되었다. 실은 할 일이 태산같이 쌓였는데도 출근길에 책을 잡아들었다. 밤샘하지, 뭐. 채점해야 할 아이들의 시험지가 가득했고 수업준비를 해야 할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나는 출근하기 전 근처 스벅을 찾았다. 남동생이 보내준 기프티콘으로 커피를 사들고 이층 창가에 앉아 책을 폈다. 하지만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뭐, 작가가 똑같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에리와 마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들어 검색을 했다. 이거 뭐야, <어둠의 저편>이랑 완전 똑같잖아? 검색 결과를 훑어보고는 나는 그저 허허 웃었다. <어둠의 저편>이 <애프터 다크>라는 새로운 간판을 갖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괜스레 허탈했다.     


  기왕 가지고 나온 책이기에 그냥 읽기로 했다. 어렸을 때 싱거웠던 책인데 이제 간이 잘 맞았다. 누군가 그랬다. 어떤 책들은 읽을 시기가 정해져있다고. 그 시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책은 읽는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어둠의 저편>은 큰 의미가 아니었지만 <애프터 다크>는 나와 즐거운 티타임을 가졌다.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들은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애프터 다크>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터라 따로 펜과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간만에 감정을 메모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책을 읽었다. 책 하나가 더 든 탓에 퇴근 길 가방이 묵직하다. 바보 같은 실수로 인해 새로운 친구를 만난 하루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불요일에는 책을 읽기로 다짐했다.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걸, 조금이라도 읽어야겠다. 눈에 종이를 익숙하게 만들면 전처럼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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