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쓰려고 시작했지만 결코 짧지 못한 후기
1. 원래는 오늘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 아니었다. 지난 주에 과제+내 중간+애들 중간+경시대회 준비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예정이었고, 하루는 집에서 푹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절하신 천사 덕질 친구분이 괜찮은 자리가 하나 있다고 양도 받을 생각 있냐고 물어오셔서 냅다 YES를 외쳤다. 오늘의 자리는 7열 왼블. 실은 지난 주에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겨우 힐링만 하고 집에 기어 들어갔고, 머리가 팽팽 안 돌아가서 섬세하게 관극을 하지 못했었다. 많이 보긴 봤나보다~ 하고 생각했고 오늘은 그냥 가볍게 보고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엘아센에 갔다. 그런데 이게 머선일...? 지난 날의 저를 반성합니다. 2021년 11월 7일. 새로운 오르페우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2. <하데스타운> 초반에 좋아했던 넘버는 <Wait for me 1>이었다. 회전문을 돌면서 좋아하는 넘버가 조금씩 바뀌고 더 생기고 다시 들으니 다른 게 더 좋고... 마음이 매번 바뀌었었다. 솔직히 뮤지컬 n회차 이런거 잘 이해 못했는데(<하데스타운>의 경우에는 내 최애가 나오니까 내가 여러 번 보아야겠다 생각했고!) 오늘을 계기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좋은 건 여러번 봐야 한다. 내 영혼에 살이 차오르고 새 피가 도는 게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오늘 오르페우슈의 감정은 두 번 크게 터졌다. 먼저, <Wait for me 1>를 부르며 에우리디케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는데... 무대위 성장캐 시우민의 얼굴에 절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나타났지 뭔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서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끝없는 감정, 지옥으로 떠난 에우리디케를 다시 되찾아오겠다는 마음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을 움켜쥐게 했다. 진짜 오늘 Wait for me는 박제 해야 된다.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 올려서 툭 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직전인 오르페우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If it's true>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났다. 극을 반복해 보면서 좋아하게 된 넘버이고, 내포된 의미도 여러번 곱씹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게 많은 넘버다. 그게 진실이면, 세상이 이런걸까? 원래는 세상에 대한 원망, 좌절, 슬픔, 허탈한 감정을 가득 담아 불렀는데 오늘은 갑자기 이 부분에서 화악!!! 폭발했다. 오늘의 넘버에서는 세상에 대한 분노, 배신감, 극복하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세상의 소수가 다수를 짓누르는 사회 안에서 다수를 위해 진실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마음에 확 와닿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소년 오르페우슈가 무대 위에서 성장했고, 오늘 드디어 남자 오르페우슈가 탄생한 거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노래 안에서 사랑을 지킬 줄 알게 된 강한 남자가. 이 사람... 이렇게 또 감동을 주네ㅠㅠ 공연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는 시우민을 저만 알고 싶지만, 큰 맘 먹고 영업합니다. 오르페우슈 보러 가세요... 당장... 표를 끊어요... 나만 알기 아까워....
3. 홍르메스와 재르메스의 차이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 하데스가 지옥으로 가는 기차표(동전 두개)를 에우리디케에게 건네주고, 에우리디케는 그걸 가지고 헤르메스가 있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서 내밀며 보여준다. 홍르메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전을 짤랑짤랑 보여주고, 재르메스는 두 손이 동전을 한 잎씩 올리고 손바닥을 보여준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두 분 모셔서 물어보겠습니다... 같은 캐릭터를 다르게 해석해서 무대에서 보여주니 관객은 더 즐겁죠~! 일단 나는 헤르메스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동전들은 모두 에우리디케의 것이고, 그녀가 생을 거듭해서 죽음을 선택, 지하 세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올렸던 거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헤르메스가 가지고 있는 동전은 모두 에우리디케가 준 것. 헤르메스는 최선을 다해 에우리디케가 이전에 했던 행동에 대한 힌트를 주고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라는 기대를 하는 게 아닐까. 일단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고 다음엔 다를 거라는 희망을 가진 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헤르메스니까. 두 헤르메스가 에우리디케와 동전을 이용해 나눈 대화의 의미... 자세히 알고 계시는 분 연락 부탁드립니다. 댓글도 환영!
4. <하데스타운>의 2층은 '신'의 공간이다. 그곳을 유일하게 올라간 '인간'은 에우리디케 뿐. 에우리디케가 2층으로 올라간 건 하데스에게 영혼을 팔기 위해서였다. 2층은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며 동시에 영원히 사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지옥으로 오르페우스도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하데스를 향해 달려 올라가다가 지옥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저지당한다. 2층은 하데스, 페르세포네, 운명의 세 여신 그리고 에우리디케. 이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인간이 철저히 배제당하고 비밀이 숨겨진 장소. 그곳은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생각된다. 평범한 인간 혹은 죽은 인간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신화에서 그렇듯 극에서도 신은 인간의 영역에 자유롭게 침범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다. 신-인간은 또 다른 계급의 형상화이다. 소수vs다수라는 대결 외에도 신vs인간의 상반된 존재가 극을 이끌어간다. 2층으로 오르기 위해 온 힘을 던졌던 건, 오르페우스가 유일하기도 하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무엇이든 바꿔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도 한다.
5. 신화원형비평의 대표적 이론에는 사계(四季)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이 있다. <하데스타운>이 전개되는 주된 힘은 '계절'이다. 극의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의 관계를 관객들에게 알려준 후,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부터가 진짜 이야기로 시작된다. 1년의 반을 지옥에서, 나머지 반을 지상에서 보내는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사랑 집착 불안에 의해 점점 지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지상을 내리쬐는 햇빛은 페르세포네가 있을 때만 내리쬘 수 있기에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의 빛을 지상에 전한다.(여름) 그러다가 하데스가 아직 6개월이 되기도 전에 페르세포네를 데리러 온다. 페르세포네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지옥에 가는 기차에 올라타고 세상은 삽시간에 빛을 잃게 된다.(가을) 갑작스러운 가을에 오르페우스는 무너진 질서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에우리디케를 등지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폭풍같은 바람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에우리디케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행 기차를 선택한다. 그리고 오르페우스는 뒤늦게 그녀를 찾으며 지옥을 향해 떠난다. 모든 등장인물-하데스, 페르세포네,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가 지옥에 있는 순간, 지상은 꽁꽁 얼어 붙는다.(겨울) 따스한 볕과 와인을 가지고 오는 페르세포네도 없고 봄을 노래하는 오르페우스도 지옥에 가 있으니 지상에는 조금의 온기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갈등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페르세포네의 바구니에는 소담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이 들어있다.(봄) 여름으로 시작해 봄으로 끝나는 <하데스타운>. 계절은 돌고 돌며 반복한다. 시작이 어디인지, 끝이 어디인지 모호하며 누구도 정확하게 선을 긋지 않는다. 프라이가 주장한 사계의 이미저리에 의하면 여름은 결혼의 단계, 가을은 죽음의 단계, 겨울은 해체의 단계, 그리고 봄은 출생의 단계를 의미한다. 1년을 반으로 뚝 잘라 만든 두 계절이 아니라, 모든 계절이 <하데스타운>에 적확하게 녹아 들어있다.
6. 오늘은 진짜 짧게 쓰고 끝내려고 했는데... 또 한시간 반 훌쩍 갔다. 다음 관극까지 2주... 힘내자... 다음은 OP석이다!! 신들과 함께 건배할 수 있는 기회다. 다음에 만나요~ 안녕!
7. 오늘의 캐스팅
- 오르페우스 : 시우민
- 헤르메스 : 최재림
- 페르세포네 : 박혜나
- 에우리디케 : 김환희
- 하데스 : 양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