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동그란 아이스크림을, 조금 더 일찍 먹어봤더라면
"나 구슬 아이스크림 먹어본 적 없어."
친구와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말에 친구는 저번에 먹었다며 구슬아이스크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찡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원하는 군것질을 해본 적 없었다. 집에 있던 간식은 언제나 달지 않은 것 뿐이었다. 달콤한 걸 좋아할 나이인데도 살이 찐다, 충치가 생긴다는 이유로 엄마는 단 걸 사주지 않았다. 입에 넣는 순간 황홀해지고, 오래오래 머금고 있을수록 짜릿해지는, 혀 전체를 알알하게 만들 정도로 달콤한 것들이 필요한 날이면 동생과 나는 찬장을 뒤져 병에 든 설탕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손가락 끝에 침을 살짝 묻혀 설탕 병에 꾹 누르면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갈색 알갱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내 혀 끝에 닿았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슬쩍 찍어 먹었어도 매번 들켜 혼나곤 했지만, 달콤한 맛은 꾸중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병원 자판기에 100원을 넣으면 먹을 수 있는 코코아도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딱 한 번만 먹어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절대 사주지 않았다. 대신 율무차나 이온음료를 사주며 저런 건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그 코코아를 딱 한 번 먹어본 적 있는데, 그건 아빠가 뽑아준 거였다. 동생이 아파서 입원을 한 적이 었었다. 엄마는 동생의 곁에 머물러야 했고 나는 아빠와 며칠을 지냈다. 늦은 밤, 동생을 보러 가자며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병원에 갔다. 약간 어두운 병원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코코아를 한 잔 뽑아주었다. 로비 의자에 아빠와 나란히 앉아 홀짝홀짝 달달한 코코아를 마셨던 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동생한테도 먹은 티 내면 안 돼.'
'응, 아빠.'
행여 누가 들을까 봐 속삭이며 나눴던 아빠와의 대화. 아빠는 가끔 엄마 몰래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곤 했다. 어두운 병원 의자에서 호호 불어 마시던 달짝한 맛은 아직도 가끔 그립다. 결국, 내 입에서 폴폴 풍기는 단내 때문에 엄마는 아빠에게 눈을 흘기며 잔소리를 했던 게 기억난다.
못 먹게 하면 더 먹고 싶은 게 사람 심리 아닌가. 학교를 다니게 되며 엄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나는 용돈으로 먹어보고 싶었던 과자와 쵸콜릿, 사탕을 사먹을 수 있게 됐다. 입안을 맴도는 단맛보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걸 몰래 하는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달콤한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가 단 걸 먹지 못하게 했던 이유가 내 발목을 잡았다. 더 뚱뚱해지면 친구들이 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충치가 생겨 치과에 가게 되면 엄마한테 혼날 게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단 걸 피하기 시작했다. 달콤함을 참아야 했다.
지금은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단 걸 먹을 수 있게 됐다. 온갖 맛의 쵸콜릿을 원할 때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물론, 책상 위에 사탕 껍질이 굴러다녀도 잔소리 들을 일이 없다. 한밤 중에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편의점에 가도 되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과자를 뜯어 입에 넣어도 혼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단 걸 자주 찾는다.
"그럼 오늘 먹어보면 되겠네."
분홍색 간판에 귀여운 글씨체로 가게 이름이 적힌 아이스크림 매대가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설렜다. 작은 컵 하나에 칠천원, 내가 원하는 대로 맛을 섞어 담을 수 있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아이스크림 값을 지불하고 구슬아이스크림을 손에 넣었다. 바나나 맛과 쵸코 맛이 적절하게 섞인 달콤한 구슬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털어 넣었다. 동글동글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귀여운 감각을 조금 더 어렸을 때 느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렸을 적 나를 찾아가 엄마 몰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여주고 싶었다.
어렸을 때 미처 다 색칠하지 못한 날을, 뒤늦게 채워 나가고 있다. 어른이라는 명찰을 달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린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걸,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했던 걸 지금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구슬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예닐곱 살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