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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Nov 06. 2022

유산 관리자를 친구로 설정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삶



  이 글은 유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아픈 이야기를 기록해보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평생 약을 먹게 되었는데, 이걸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픔도 글도 끝이 없을 것 같아서요. 오롯이 나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시작한 브런치인데, 나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쓰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2022년이 다 가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요.


  최근에 다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죽음을 겪어서인지, 원래부터 살고 싶은 의지가 남만큼 없어서인지 죽음을 준비하는데 익숙합니다. 믿을 만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틈틈이 내가 죽은 뒤에 대한 일을 부탁하기도 하고요. 이번 참사 후, 좀 더 본격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삶으로 바뀐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이 이야기를 하면 딴 길로 샐 것 같으니, 기회가 된다면 새로 써봐야겠습니다.)


  아이폰은 유산 관리자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유산 관리자는 제가 죽은 후 핸드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죠.


사용자가 유산 관리자 접근 요청을 할 때 생성되는 접근키(큐알코드)와 사망진단서가 있으면, 사용자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고민 없이 한 친구를 선택했습니다. 14살 때부터 지금까지 잘 지낸 친구죠. 4년 정도 함께 살았고, 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친구입니다. 친구는 제가 죽은 후, 제가 원하는 대로 뒷일을 정리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예를 들면, 동생이 제 장례식의 상주가 되지 않길 바란다거나, 엄마가 제 삶의 흔적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 모든 일처리 후 남은 돈은 친구와 다른 친구 둘이서 나눠 갖길 바라는 것 등등. 누군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소원이죠. 그리고 아무나 이뤄주지 못할 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이 친구를 선택했습니다.


설정>사용자 이름 탭>암호 및 보완>유산관리자 메뉴를 이용하면 쉽게 설정 할 수 있습니디.



  죽은 사람에게도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죽은 후에 자신의 삶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는 것에 대한 게 그다지 두렵지 않을 수 있을 텐데요. 불행히도 인간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으니 살아생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이 빠져나간 몸뚱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유산 관리자를 설정하게 되면 <유산 관리자 접근 > 생성됩니다. 인쇄를  수도, 이미지로 저장할 수도 있죠. 요즘 같은 세상에 저장  전송하면 깔끔하고 간편하겠지만, 저는 굳이 인쇄를 했습니다. 종이로 뽑는   확실하다는 느낌이더라고요. 신세대는 아닌가 봅니다. 아직은 종이가  신뢰가 니다. 개인 정보 때문에 온전한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아래에는 유산 관리자의 이름과 사용자의 애플 아이디, 접근 관리 키가 적혀있습니다.

안네는 키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죠. 종이는 사람보다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이라며. 쉽게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보다 종이가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 개인적인 일로 서울에 올라온 김에 만나기로 했죠. 줄 게 있다고 슬쩍 운을 떼어뒀지만,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말로 오갔던 이야기였던 게 구체화되었으니까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평소에 소소한 일을 부탁하는 것처럼 받아주길 바랐습니다.


친구는 커피를 마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저를 위해 매번 카페는 커피가 맛있는 곳을 검색합니다.


  다행히 친구는 제 선물(?)을 받고 좋아해 주었습니다. 조금 무거운 종이라며 잘 보관하겠다고 약속도 해줬습니다. 귀에 딱지가 얹힐 정도로 부탁해왔던 내용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내 삶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었죠. 제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더는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친구는 그 이유를 잘 알기에 제 부탁도 흔쾌히 받아준 거고요.


  5년 안에 법적으로도 친구를 상속자로 설정할 계획입니다. 변호사를 통해 어떤 서류를 작성하면 된다던데, 아직 확실하게 알아본 게 아니라 확실히 남길 수 없습니다. 나중에 모든 걸 준비한 후에 다시 글을 남기지 않을까요?


  저는 가끔, 죽기를 너무도 원합니다. 완벽히 준비된 죽음을 꿈꾸고 있고요. 삶보다는 죽음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생각만 하고 있던 일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는 것만큼 죽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사람들의 아픔도 아우를 수 있는, 그런 멋진 죽음을 위해 오늘을 또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해도 괜찮을 수 있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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