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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안이었다

– 영화 <인사이드 아웃> : 기쁨이 우리를 지키지 못할 때

by Minseung Kang

의외였다. 국내 다수의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누구보다 활달해 보이던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존재가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감에 늘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방송인 전현무 씨의 이야기다. 그는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방송사에서)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아서 웬만한 섭외는 거절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을 믿지 않는 대신 자신의 능력만을 믿기로 했다고도 했다.

그의 불안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나는 타인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법을 배웠다. 겉으로는 배려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한 생존 방식이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줄 알았던 그가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불안을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미안했고 동시에 조금 안도했다. 그의 불안은 결코 개인적인 성격이나 과잉 반응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와 관계의 구조가 끊임없이 그에게 요구해 온 생존의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불안은 어떤 욕망에서 비롯된다. 갖고 싶거나 되고 싶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선택의 대가가 너무 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낳은 사생아. 실패의 책임이 오롯이 개인에게 돌아오는 현실도 그 불안을 키운다. 왜냐하면 결과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안을 피하려 욕망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욕망은 언제나 복합적인 감정의 산물이며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는 실패해도 괜찮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을 떠받쳐줄 언덕이 부족하다. 재기의 기회는 드물고 복구의 시간은 비싸다. 그래서 조심하고, 더 준비하고, 더 민감해져야만 한다. 딱 그만큼만 불안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안은 늘 그것을 초과한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광고 속 문장은 그래서 기만적이다. '너'로 호명되는 순간 나는 어딘가 부족한 존재가 되고 즉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놓인다.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시대라는 외피 아래 개인은 계급 상승을 위한 무한 경쟁에 투입된다. 타자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신의 약점을 과장하며 스스로를 질책한다. 마치 페달을 멈추면 곧장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실패할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또 그렇게 살아남는다. 익숙해진 불안 속에서 우리는 이제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그렇게 불안은 일상이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린다.


2015년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1편은 한 아이의 머릿속 감정 시스템을 시각화한 영화다. 주인공 라일리는 다섯 가지의 감정(기쁨, 슬픔, 분노, 혐오, 소심)이 조종하는 내면의 컨트롤타워 안에서 스스로를 형성해 간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중심은 단연 ‘기쁨’이다. 라일리의 기억은 구슬 형태로 저장되는데 대부분의 ‘핵심 기억’은 노란색 기쁨 구슬이다. 주체를 이루는 감정 체계가 지나치게 ‘밝음’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단순히 ‘기쁨이 최고’라는 낙관적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신념이 어떻게 위기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복선처럼 읽힌다.

기쁨은 슬픔을 통제하고 분노와 혐오는 위험 회피용 기능으로 제한되며 소심은 종종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과장된다. 그런데 아이가 낯선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이 기쁨 중심 체계는 붕괴를 맞는다. 슬픔이 기억을 오염시키고, 기쁨은 슬픔을 제어하지 못하고, 라일리는 더 이상 자신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이 구조는 감정을 감각이 아닌 성과로 환원해 온 문화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기쁨이 많은 아이’는 좋은 아이, 슬픔이나 분노를 보이지 않는 아이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아이. 정서는 ‘조절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의 다층성을 잃는다.


<인사이드 아웃> 1편은 '기쁨의 독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보여준다. 기쁨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늘 밝아야 한다는 압박은 주체를 서서히 갉아먹는다. 이야기의 후반, 라일리는 깨닫는다. 슬픔 없이는 진짜 위로도, 깊은 관계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쁨이 슬픔과 손을 맞잡는 순간, 감정은 정제되고 삶은 비로소 깊어진다.


1편이 '기쁨의 몰락'을 다뤘다면, 2편은 '불안의 대두'를 이야기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라일리는 이제 다섯 가지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불안', '질투', '수치심', '권위의식' 같은 새로운 감정들이 기존 체계와 충돌하며 자아 정체성을 흔든다. 그중에서도 '불안'이 감정 본부를 장악한다. 최악의 상황까지 시뮬레이션하며 라일리를 보호하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불안은 기쁨을 변두리로 밀어낸다.

이 변화는 감정 구조의 중대한 전환이다. 기쁨에서 불안으로의 주도권 이양, 그로 인한 결과들. 사춘기의 감정은 원색적이지 않고 모호하며 복합적이다. 자아와 타인의 시선, 성취와 실패의 공포가 얽혀 있다. 여기서 불안은 파괴적이기보다 오히려 방어적이며 예측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감정으로 기능한다. 낯선 상황, 예상하지 못한 관계, 사랑하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불안은 감정들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내면의 레이더가 된다. <인사이드 아웃> 2편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불안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감정으로 재정의한다는 것.


전현무의 고백은 불안이 어떤 감정인지를 새삼 환기시킨다. 누구보다 활달해 보이는 사람조차 불안을 연료로 움직인다. 이 불안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은밀한 정서가 아닐까. 문제는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을 감추고 외면하려는 태도다. 라일리처럼, 우리도 불안에 쓸려가기 싫어서 애써 ‘기쁨’을 가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 가장은 오래가지 못한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감정 본부를 장악해 버리고 시스템은 과열되거나 정지된다. 불안을 배제한 감정 체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기쁨을 유지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불안을 다룰 것인가’로.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것. 불안은 결핍이 아니라 감각이며, 무능이 아니라 예민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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