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은 당신의 선의를 증오한다

- <오징어 게임> : 폭력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맞서는 이타적 인간성

by Minseung Kang

Netflix 〈오징어 게임〉이 말하는 ‘폭력’은 주먹이나 총이 아니다. 규칙이나 절차, 환경 설계 같은 보이지 않는 장치가 사람들을 특정 자리로 몰아넣고 위험을 더 많이 떠안게 만드는 방식 자체를 폭력으로 규정한다. 요한 갈퉁이 이를 “구조적 폭력”이라 호명했듯, 누가 누구를 때렸는가 보다 누가 어떤 자리에 배치되어 기회와 안전에서 배제되었는가가 핵심이다. 개인적 폭력이 없어도 구조가 고통을 꾸준히 생산하면 폭력은 지속된다고 판시된다.


이 구조는 대개 ‘선택’의 언어로 자신을 포장한다. 표면적으로는 자발성이지만 옵션의 배치와 기본값, 보상 체계가 이미 방향을 사전에 설정해 둔 상태다. 행동경제학은 이를 ‘선택 설계’라 하고 “금지하지 않으면서도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을 바꾸는 환경의 디자인”이라고 정리한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할지 말지”를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빚과 절망이 선택지를 사실상 하나로 줄여 놓았다는 점은 이 설명과 겹친다.


첫 장면의 ‘딱지치기’는 이 구조의 예고편이다. 따귀의 육체 감각이 즉시 금전 거래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폭력은 회계와 들러붙는다. 이어지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구조적 폭력의 세 가지 법칙을 드러낸다. 규칙은 단순하고, 집행은 즉각적이며, 맥락은 삭제된다. 에피소드 2의 다수결에 의한 '중단'은 형식상으로는 분명히 자유처럼 보이지만 다음날 상당수가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바깥이 더 가혹하다는 전제 위에서 떠날 자유는 실질적으로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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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장치는 이 위장을 안정화한다.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은 외부의 강제를 내면화시켜 자기 감시를 유도하는 권력 기술이다. 카메라와 마이크, 침상과 복도의 시야는 처벌보다 먼저 복종을 낳는다. 덜 때리고 더 잘 통제하는 통치술—“덜 처벌하되, 더 잘 처벌한다”—이 게임의 질서로서 작동한다. 관음의 VIP 라운지는 최종 판단의 무대가 아니라 최종 면책의 프레임이다. 보는 자는 책임이 없다. 규칙이 자발성의 언어로 수행될 때, 권력은 밖에 서 있을 수 있다. 시스템은 스스로를 중립적 중개자로 위장한다.


이런 구조 상에서 ‘구슬치기’는 신뢰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깐부’라는 보호의 언어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규칙 앞에서 무력해진다. 상우(박해수)의 기만과 알리(아누팜)의 선의가 충돌하는 장면은 배신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설계의 귀결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유리발판’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앞사람의 추락이 뒷사람의 안전 경로가 되는 순간, 애도는 데이터가 되고 타인의 죽음은 경로 최적화의 정보로 바뀐다. 시퀀스 말미에 날아든 유리 파편이 새벽의 배를 찢는 장면은 슬픔이 경쟁에 흡수되는 메커니즘을 시각화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는가? 성기훈(이정재)의 봉기는 그 대상이 애매하다. 시스템, 즉 신자유주의로 체화된 집단적 인식에 대한 근본적 도전인지, 아니면 설계자들이 만든 게임의 결함에 대한 미시적 저항인지 분명치 않다. 시즌2에서 ‘혁명’이 소환되었을 때, 진정한 실패 요인은 설득 과정의 무력함이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집단적 봉기로 극적으로 전환되던 감정적 동력은 있었지만, 왜 각 인물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는지—욕망의 공유, 위험 계산의 정합성, 정서적 공감대—를 서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하면서 강철 같은 대오를 유지해야 했던 혁명의 설득력에는 틈새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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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시스템에 의해 흡수되어 버렸다. 반란이나 내부자의 이탈처럼 격렬한 충격조차도 곧바로 상품화되어 다음 시즌의 동력으로 전환된다. 이는 봉준호의 <설국열차>에서 윌포드가 봉기를 승차율 관리 시나리오로 설계한 것과 다름없다. 볼탕스키와 키아펠로는 자본주의가 비판을 흡수하여 체제의 회복력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분석을 통해, 실패한 혁명이 이야기적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의 회복력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타’라는 이름의 인간성은 어디에 놓이는가. 실험경제학은 협력이 전염되듯 퍼지고, 이타적 처벌이 공공재 협력을 유지하는 데 핵심 동기임을 보여줬다. 선행은 연쇄를 낳고, 배신자에 대한 비용적 처벌은 장기적으로 협력을 안정화한다. 그러나 다수결과 기본값이 이미 예정된 환경에서는 이 전염이 자라날 토양이 부족하다. 이타의 전파 속도보다 구조의 회복 속도가 빠를 때, 선의는 위험 신호로 감지되어 격리된다. 시스템은 인간성의 전염 가능성을 ‘질서 교란’으로 취급하고, 이를 감시—집행—면책의 회로로 빠르게 봉쇄한다.


〈오징어 게임〉의 핵심 축—프런트맨과 성기훈—은 이 상호작용의 모델이다. 프런트맨은 자기 절단을 통해 구조에 최적화된 인물, 성기훈은 끝내 인간적 망설임을 버리지 못하는 변주다. 권력은 이타를 위험으로 탐지한다. 이타는 전염되고, 전염은 규칙의 질서를 교란한다. 따라서 시스템은 이타를 시험하고, 고립시키고, 실행 환경 밖으로 밀어내거나 내러티브 내부에서 무력화한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이타는 전략으로 환원되거나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프런트맨은 결국 철저한 이상주의자였던 성기훈을 향해, 자신이 체현해 온 시스템의 승리를 증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죽이지 않는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구조” 안에서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믿었던 성기훈을 끝까지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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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각 장면은 오늘의 사회적 조건과 맞물린다. 부채·데이터·감시가 결합한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게임’의 외부에 있지 않다. 시리즈가 보여준 카메라의 배치는, 실제 세계의 데이터 추적·행동 예측·A/B 테스트를 통한 행태 설계와 구조적으로 상동적이다. 스펙터클은 우연한 외피가 아니라, 폭력의 비용을 하향식으로 분산하는 핵심 장치다. 이미지로 매개된 참여와 소비는 고통을 볼거리로 만들고, 볼거리는 비용과 책임을 분할해 아래로 흘려보낸다.


그럼에도 인간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보상받지 못한다. 협력의 미시적 연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체제의 균열로 성장하려면, 첫째, 규칙의 기본값을 교란하는 제도적 개입(예: 손실회피를 이용하는 반-기본값 설계), 둘째, 감시에 의해 분절된 주체들을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정보 비대칭의 해소, 셋째, 스펙터클을 통해 거래되는 저항 서사를 ‘관람’이 아니라 ‘조정 불가능한 실천’으로 전환하는 매개가 필요하다. 이 셋이 부재하면, 선행은 사각지대에서만 명멸한다.


다수결은 겉으로는 민주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단지 절차적 외관만으로 폭력의 배분이 정당화될 수 있다. 기표로서의 ‘공정’이 작동하는 순간, 실질적 위험과 그 분담의 비대칭성은 교묘히 숨겨진다. 게임이 중단되었다 재개될 때 핵심은 선택 자체가 아니라 선택지를 벗어난 ‘외부’의 부재—외부가 닫혀 있다는 사실이다. 닫힌 선택은 사실상 강제이며, 그런 상황에서 이타적 결단은 비합리로 낙인찍히고, 합리성의 프레임은 생존을 점수화하는 논리와 맞물린다.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안의 ‘생리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설계자의 일방적인 규칙이며, 설계자의 의도가 내포된 폭력이다. 그리고 진정한 절망은, 애초에 기표로서의 ‘공정’이 이미 기만일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살육의 밤을 멈춘 것은 1번 참가자였고, 유리에 비치는 빛을 꺼버린 것도 결국 스폰서들이었다. 진정으로 공정했다면, 처음에 설정된 환경적 조건들을 중도에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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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바깥의 한국영화 텍스트들은 이 논리를 보강한다. 〈부산행〉은 국가·시장 실패의 재난 상황에서 누가 구조되고 누가 버려지는지를 계급·이동성·책임의 문제로 제기했다. 생존을 둘러싼 이타와 배신의 진폭은 네크로폴리틱스—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의 통치—의 시각으로 읽힐 때 더욱 선명해진다. 〈터널〉은 하나의 생명을 둘러싼 행정·언론·여론의 비용-편익 계산이 어떻게 개인의 위기를 조직적으로 지연·은폐·분산하는지 보여준다. 이 두 텍스트에서처럼, 시리즈 또한 재난·부채·감시의 회로 속에서 ‘선택을 허락하는 폭력’이 어떻게 일상을 점유하는지 추적한다.


결국, 폭력이라는 시스템과 이타라는 인간성의 대결은 힘의 대칭 시험이 아니다. 폭력은 규칙·감시·스펙터클을 통해 자신의 비용을 분산하고, 실패와 저항마저 흡수하며 회복된다. 이타는 전염 가능성을 가졌지만, 기본값과 감시가 중첩된 환경에서는 성장의 임계에 도달하기 어렵다. 프런트맨이 구조의 최적화 형상이라면, 성기훈은 구조가 보지 못하는 틈(정전, 사각, 오프 카메라)에서만 작동 가능한 인간성의 잔여다. 시스템은 이 잔여를 끊임없이 검출하고 중성화한다.


그래서 게임은 끝났지만 구조는 남았다. 시즌의 커튼이 닫혀도 무대는 그대로이고, 배우만 교체된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무대의 바깥이 아니라면, 질문은 바뀐다. 어떻게 규칙을 거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서 규칙을 멈추게 할 것인가. 대답은 미시적 영웅서사가 아니라, 기본값·감시·스펙터클을 재설계하는 집합적 행위의 조건 속에 있다. 그전까지 인간성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보상받지도 않을 것이다. 구조가 회복되는 속도가, 인간이 망설이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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