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번이 실패해 온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 이번엔 다를까?
2008년 8월 8일, 그날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었다. 전 국민의 이목이 올림픽에 쏠린 바로 그날, 이명박 정부는 공영방송의 수장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오전 10시, 정연주 전 KBS 사장 해임안을 통과시키려는 이사회가 본관 6층에서 열렸고 수십 명의 직원들은 그 회의의 진행을 막기 위해 회의장 내부로 진입을 시도했다. 청와대가 낙하산 사장을 앉히려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종료되면 회사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무더운 여름의 복판에서 사복 차림의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날의 해임 절차는 속전속결이었다. 감사원이 불과 한 달 전 발표한 ‘특정감사’ 결과를 근거로 여당 성향 이사 7명이 해임제청안을 가결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즉시 대통령에게 제청, 대통령이 재가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사장이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자리는 곧바로 이명박 캠프와 가까운 인사로 채워졌다. 사장 교체와 함께 보도본부장, 보도국장, 편성본부장 등 핵심 간부들이 줄줄이 교체됐다. 뉴스의 톤은 눈에 띄게 달라졌고 비판적 시사 프로그램들, 특히 <추적 60분>은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획 단계부터 압박을 받거나 아이템 자체가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17년 전 그날의 사건은 이후 모든 정권에서 반복됐던 ‘공영방송 장악 매뉴얼’의 전형이 됐다. KBS가 정치권력에 의해, 집권 세력의 성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 보도 이후 보도국 간부를 교체하고 편성 기조를 바꾸는 방식으로 간접 통제를 강화했다. 윤석열 정부는 수신료 분리징수를 전격 단행, 공영방송의 재정 기반 자체를 뒤흔들었다. 성향과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보다 당장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그들에게 공영방송은 단지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정책 홍보를 위해 기능해야 하는 존재 같은 것이었다.
그들과는 색이 다른 문재인 정부는 어땠을까? 문재인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통합방송법 등 방송·통신 규제체계를 정비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 설치를 공약 전면에 내세우면서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의 정치적 균형 강화, 편성·제작의 자율성 확보 등 제도적·구조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사회의 구성 구조, 편성 위원회 설치, 정권 영향 배제 등의 조치는 그간의 통틀어 가장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제도 설계 시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집권 후 제도 개선은 야당의 반대를 이유로 중단됐고, 더 이상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국회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한 시기였지만, 공영방송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의지를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는 구조적 제약이 아니라 실행 의지의 부재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미필적 고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그렇다면 정당에 상관없이, 정치권은 왜 공영방송을 놓지 못하는가. 공영방송은 시청률이 예전보다 낮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전국 단위의 도달력을 가진 몇 안 되는 매체다. 선거 때마다 여론조사와 토론회의 프레임을 형성하는 핵심 무대이고, 정권의 메시지를 전 국민에게 균질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널이다. 더구나 지방과 수도권, 세대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닿는 매체는 공영방송뿐이다. 정권이 이 영향력을 완전히 손에서 놓는다는 것은 곧 권력의 도달 범위를 스스로 축소하는 일이다. 그래서 집권 세력은 ‘독립’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통제권을 유지하려 한다. 이것이 정치가 공영방송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이유다.
또한, 공영방송을 권력과 자본의 압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시키면 공영방송은 그 강력한 인프라를 기반으로 언론으로서의 본연의 기능에 더욱 충실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그 즉시 권력감시 기능을 크게 강화시킬 것이다. 집권 세력은 자신이 도모해 준 공영방송의 독립이 오히려 자신의 정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이건 계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여야는 역대로 공수가 바뀌어도 공영방송 정상화에 관한 대사는 바뀌지 않았다. 여당의 대사, 야당의 대사가 마치 정해져 있는 대본처럼 그대로 반복된다. (수신료 분리징수 역시 사실 윤석열 정부가 처음 꺼낸 얘기는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후인 2017년, 박주민 의원을 필두로 한 민주당에서 먼저 나왔다. 둘 다 자당에 우호적이지 않은 KBS를 압박하기 위한 시도였다.)
현실 정치에서 공영방송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 아니 최소한 공영방송이 살아있는 권력을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오직 대통령이 선의(善意)나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상황이 갖추어지고 또 실제로 기능했던 건 21년 차 PD로서 나는 단 한 번 경험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공영방송 KBS 사장과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한 바 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입증했다. 그런데, 그래서 그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지난하고 굴곡진 역사가 끝나가는 것일까. 지난 8월 5일, 이른바 ‘방송 3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25년 방송법 개정안은 KBS 이사회를 11명에서 15명으로 확대하고, 추천 주체를 정치권 중심에서 시청자위원회·방송 종사자·학계 등으로 다변화했으며, 100인 이상의 국민이 참여하는 추천 위원회가 사장 후보를 제시하면 이사회가 이를 선임하는 구조로 바꿨다. 또한 법 공포 후 3개월 내 새 이사회를 구성하도록 해 단기간 내 제도 전환을 강제하고, 보도책임자·사장 임명 시 노동조합과 내부 구성원 동의를 필수화했다.
이재명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역대 정부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말로만 주장하던 관행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치권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축소하고, 운영 투명성과 자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특히 사장을 선임하는 이사회 구성에 있어서 정치권력이 스스로 그 몫의 일부를 내려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정치권력은 공영방송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자신의 영향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려 하고 있는 이 ‘아름답고 무용한’ 공영방송을 이재명 대통령은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정치인의 선택은 대부분 효용의 논리로 설명된다. 인사, 정책, 법안 처리 모두 ‘쓸모’와 ‘효과’의 언어로 포장된다. 그 속에서 아름답고 무용한 것은 장식이 되거나, 홍보 수단이 되거나, 일시적 감정 동원에 쓰인다. 끝까지 지켜야 할 이유로 존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통령에게 방송 3 법은 정권 말기까지 공영방송의 우호적 환경을 보장하는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공영방송을 정치로부터 떼어놓을 의지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권력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것인지는 아직 두고 봐야 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