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해요, 나한테!

- 그들은 왜,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가?

by Minseung Kang

윤석열은 계엄령 선포와 관련해 “고작 2시간짜리였다”라고 항변한다. 자신에게 돌아온 책임의 무게가 과도하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책임은 시간의 길이나 조치의 지속성으로 면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과는 결과의 일부가 아니라 권한 행사의 방식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더구나 사전 공표 없이 계획된 계엄령은 시민의 통제를 배제한 일방적 판단이었으며, 공공의 신뢰를 침해한 결정이다. 윤석열이 진심으로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다면, 먼저 자신이 행사한 권한이 어떤 결과를 낳았고, 그 판단이 왜 부적절했는지를 직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고립시켜 ‘과도한 응징’이라는 프레임으로 되돌려주기를 요구한다. 그는 여전히 억울하다고 말한다. 여전히 예우를 기대한다.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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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사태를 '망신주기 수사'로 규정했다. 과도하게 모욕을 준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이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상황을 통과했다. 그 역시 가족 관련 금품 수수 의혹으로 수사를 받았고, 검찰 소환 요구를 받았다. 그는 망신주기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받겠다는 태도로 임했다. “이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그는 조작을 의심하거나 절차의 부당함을 항변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책임은 명예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윤석열이 지금 서 있는 곳은 그 반대 방향이다. 그는 자존이 아닌 면피를 택했고, 책임이 아닌 억울함을 내세운다.


사과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힘을 가졌고, 그 힘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자각하는 일이다. 권한을 행사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과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그 권한이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 영향에 대해 자신의 이름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사과는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형식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정확히 계산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연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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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제가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드립니다.” 그렇다면 며칠 전, 사과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윤석열의 아내이자, 전 영부인인 김건희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형적인 회피 사례다. 이 한 문장은 사과의 대상을 비껴간다. 주어인 ‘제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설정되고, 동사는 ‘사과드립니다’인데 목적어는 없다.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하는가가 삭제되어 있다. 국정 운영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대통령의 배우자였다는 점, 그 지위를 활용해 특정 기업으로부터 고가의 사치품을 수수했다는 혐의가 존재한다는 점, 그로 인해 발생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가 존재한다는 점, 이 모든 요소들이 사과문에서 제거된다. 남은 것은 겸손으로 가장된 자기 비하와 ‘심려를 끼쳐드려’라는 통상적 유감 표현뿐이다. 그러나 공직자 혹은 권력자에게 요구되는 사과는 '심려'를 끼쳤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 권한을 어떻게 행사했는가'에 대한 인정이다. 따라서 이 사과는 감정적 어법만 있고, 책임 인식은 결여되어 있다. 이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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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형식이 진심을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과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일본의 ‘도게자’는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리는 극단적 사과의 형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형식은 두 가지 효과를 동반한다. 하나는 비가시적 감정을 가시화하여 상대에게 ‘이 정도면 됐다’는 심리적 피로감을 제공하는 효과, 다른 하나는 사과 행위를 완료된 절차로 전환시키는 종결의 신호다. 즉, 도게자는 감정의 진위를 측정하기 위한 신호가 아니라, 사과라는 행위를 종결시키기 위한 도식적 장치로 기능한다. 일본 영화 <사죄의 왕>은 이러한 사과의 형식을 역으로 전시하며, 반복을 통해 그것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영화는 처음에는 관객에게 진심 없어도 사과하는 기술을 제시하는 듯하다가,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 기술이 결국 ‘진심 없음’ 자체를 고발하는 장치였음을 드러낸다. 이 구조는 사과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 불일치가 사과 자체를 무효화시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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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심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사과의 핵심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인정과 책임의 수용이다.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대통령이 행사하는 공권력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이 공적 신뢰를 해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아무것도 아닌 제가”라는 말은 현실 왜곡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자리에 없었던 수많은 국민이 “모든 책임을 지라”는 묵시적 선언을 감내해야 한다. 즉, 사과의 주체가 스스로의 영향력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과는 ‘무엇에 대해’도,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않는다.


사과는 말보다 맥락이 먼저다. 말은 선택할 수 있지만, 관계와 권한, 위치는 선택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조건을 회피할 수 없으며, 그 조건에 상응하는 태도를 통해서만 신뢰를 얻는다. 박근혜는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은 죄책감이 아닌 모욕감의 표현처럼 보였다. 온몸이 떨리고 목소리는 울렸지만 정작 그 사과가 향하고 있던 방향은 피해자인 국민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이었다. 진심을 감정의 양상으로 판별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눈물은 공감의 증거가 아니며, 고개 숙임은 회개의 신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 결과가 누구에게 어떤 고통을 남겼는가,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감당하겠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영화 <헌트>의 김정도(정우성)는 가해자다. 그는 자신이 명령을 내린 주체는 아니었으나, 그 체계의 일원이었고, 결과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앗는 폭력에 가담했다. 그는 사과하고 싶었으나,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피해자는 사라졌고, 가해자는 익명화되었으며, 그는 그 둘 사이에서 자신의 죄를 떠맡을 구체적 상대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행동한다. 남겨진 삶 전체로서 사죄하고자 한다. 이는 사과가 말의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말로 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라도 해야 하며, 그 행동은 책임의 무게를 자기 자신이 감당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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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해요, 나한테”라는 말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다. 이미 끝난 사건이 되돌려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상처에 대해 최소한의 공감과 책임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문장은 울분이 아니라 냉정으로 발화된다. 물론 사과의 정석은 존재한다. 유감 표명과 진상 규명 그리고 재발 방지 약속.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될 때, 그 사과는 실질적 사과로 기능한다. 감정 표현이 전제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책임의 무게를 인정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감당이 자신의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까지 받아들일 때, 그 사과는 비로소 신뢰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사과는 언제나 불편해야 하며, 그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는 사과는 회피이거나 위장이거나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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